대충 내용소개와 독자평을 정리하여 위에 올렸더니, 특히 사장이 그 책이 꽤나 마음에 든 듯,
얼른 구해보라 하여 특급으로 받아 보여줬다.
일반인보다 10배나 빨리 늙어 평균수명이 13세라는 조기노화증 환자인 열네 살 소녀가,
항상 죽음을 예비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너무나 밝고 긍정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본인의 삶을 쓴 책.
나이가 나이다보니 내용도 쉽고, 분량도 꽤 짧다.
사장이 책을 이리저리 흝어보더니, 나 주말에 이 책 읽고 싶은데, 란다.
그러니까 나보고 번역을 해서 주라는 말씀.
하여 급하게 책을 번역하게 됐는데, 이게 참, 문장은 참으로 쉬운데 그 내용이 너무나 밝고 건강하여
번역하면서도 마음이 영 불편하다. 게다가 14살 소녀적 감수성을 담으려니 더욱.
예컨대 다음과 같은 문장.
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슬픈 표정을 짓고 싶지 않아요. 제가 웃고 있으면 모두가 행복해지는걸요.
차를 타고 갈 때, 거리를 걸어갈 때, 저를 신기하게 쳐다볼 때면 짜증내지 않고 함박웃음을 지어 보여요. 그러면 그 순간 그 사람도 제게 웃음을 지어줘요.
이런 표현을 옮겨 치면서 속이 니글니글거려 참 힘들다.
이 불건전하고 타락한 속물인 나라는 인간이 이런 글을 읽고 옮긴다는 건 참으로 곤욕스러웠다,
라고 아까 점심 먹으며 누군가가 그 책의 행방에 대해 물어 갑자기 든 생각.
어쨌든 그 소녀가 아직까지 건강하고 밝고 살아가고 있기를!
*사실 다큐멘터리로 먼저 만들어져 굉장한 반향을 일으켰는데 방송국과 판권이 복잡하게 걸쳐 있어
책은 국내에 나오기 힘들 듯. 뻘짓을 한게다.
*제목은 하루키의 <무라카미 아사히도는 어떻게 단련되는가>에 실린 '취미로서의 번역'에서.
군대 있을 때 심심해서 했던 번역이라 더욱 엉성하다. <오블라디 오블라다 인생은 브래지어 위를 흐른다>라는 책에 실려 있으니 읽다 답답하신 분은 그쪽을.
취미로서의 번역
최근 취미가 뭐세요 라고 물어오면 "글쎄요. 번역인가..."하고 대답하게 됐다. 행여 선보는 자리에서 그딴 소리했다가는 상대방을 뜨악하게 하여 될 일도 그르칠지 모르겠다. "그쪽에서, 글쎄 번역이 취미라고 말하고 앉아있는데, 이번엔 역시 좀..." "그래요? 번역이 취미라니..." 어디선가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거 같은 기분이 든다. 일요일에 할 일없이 스카이라인GTR을 타고 하코네에 가서 고갯길에서 단란한 가족을 쫓아 다니는 것보다야 훨씬 점잖은 취미라 생각하지만, 그건 그거고. 그렇지만 번역은, 그 정확한 의미에 있어서 나의 '취미'라고 말하긴 어렵다. 그건 내가 여태껏 제법 많은 번역서를 내왔고(그 대부분은 미국의 현대소설이다), 이미 내 직업의 일부가 됐기 때문이다. 원래 얼치기로 시작한 거라 이제와 다시 보면 식은땀이 흐르는 부분도 많아 잘난 체할 건덕지도 없지만 여튼 세간에는 번역가 나부랭이로 취급받고 있다. 그렇지만 역시 '번역은 취미'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나에겐 있다. 여튼 틈만 나면 바로 책상에 앉아선 충동적으로 번역을 하곤 하니까. 특별히 생활을 위해 하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의 청탁으로 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하지 않으면" 따위의 사명감에 불타 하는 것도 아니고, 공부 삼아 하는 것도 아니다 - 결과적으로 귀중한 공부가 되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결과물이다. 확실히 말해 나는 번역이란 행위 자체가 좋아서 이렇게 실증 내지 않고 꾸준히 번역을 하고 있는 게다. 이걸 취미라 하지 않고 뭐라 하리오...
곧잘 "이렇게 번역을 하기 위해선 초벌 번역을 쓰시겠네요?"라고 질문을 받는 데, 나는 초벌번역을 써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내 주변에서도 초벌번역을 쓰는 사람은 없다. 물론 이런 일은 결과가 좋으면 모든 게 좋듯이 초벌번역을 쓰는 것이 좋다, 나쁘다 할 계제는 아니다. 그저 개인적으로는, 초벌번역을 쓴다는 건 번역이라는 작업의 가장 맛있는 부분을 놓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번역에 있어 가장 가슴이 두근거리는 때란 뭐라 해도 가로로 늘어뜨린 언어들을 세로로 일으켜 세우는 그 최초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때 머릿속 언어시스템이 근육을 삐꺽삐꺽 스트레칭하는 감각이란 뭐라 할 수 없이 좋다. 번역된 문장의 리듬의 신선함은 이 최초의 스트레칭 안에서 생겨난다. 이 쾌감은 필시 실제로 맛본 사람밖에 모르는 것이리라. 나는 문장 쓰는 법의 많은 부분을 이러한 작업을 통해 결과적으로 배웠다. 외국의 빼어난 작가의 문장을 하나씩 하나씩 가로에서 세로로 "이영차"하며 고쳐나가며 문장이 가진 비밀(미스터리)을 뿌리 깊이 해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번역이라는 건 무지막지하게 시간 걸리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작업이지만, 그 덕택에 세밀한 곳곳이 뼈 속 깊이 전달되는 큰 이점이 있다. 생각일 따름이지만, 번역을 뿌리깊이 좋아하는 인간치고 고약한 인간은 없지 않을까 싶은데. 어쩌면 다소 눈치없는 구석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결코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를 사람은 아니라 생각한다. 그러니, 맞선 상대가 "전 번역이 취미예요"라고 말해도 그것만으로 무턱대고 싫다 하지 마시길. 그 기분을 모를 바 아니지만.
내가 처음 번역을 시작할 무렵엔 "소설가가 일부로 번역을 하는 건데 보통의 번역자들 하곤 색다른 맛의 번역을 해야하지 않을까"하는 의식이랄까 자부심 따위가 마음 한구석에 있었는데 한동안 경험이 쌓여가며 이리저리 머리를 쾅쾅 부딪친 후에야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란 걸 깨달았다. 자기 색깔을 되도록 드러내지 않고, 가능한 한 착실히 자기를 지우고 텍스트에 바싹 붙어 맛다른 곳에 이르면 그 결과는 자연적으로 맛이 나고, 그자체로 훌륭한 것이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독자적인 자기 냄새를 풍기려한다면 그건 번역자로서 역시 이류라 할 수밖에. 번역의 진정한 재미는 뛰어난 오디오 장치가 어디까지나 자연음을 추구하는 것과 같이, 사소한 단어 하나 하나에 이르도록 얼마나 원문에 충실히 번역했느냐에 달려있다. 예컨대 스피커에 적용해보자면, 듣는 이가 "아, 이거 멋진 소리구만"이라고 생각되면 이류, "아, 이거 멋진 음악이구만"이라 생각되면 그야말로 일류다. 나는 번역을 하면 할수록 더욱더 절실히 느껴지게 됐다. 그렇지만 유감스럽다할까, 말할 나위도 없다고 할까, 나는 아직 그런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알고 있기는 한데" 이 정도다. 한마디로 취미라 했지만 건들면 건들수록 의외로 바닥이 깊은 분야다.
그런데 올해는 빌 크로우의 <안녕 하드랜드>, 피츠제럴드의 <바빌론의 귀환>, 마이클 길모어의 <심장을 찔려>를 취미로서 번역하고 있다. 시간 있으시면 읽어보시길. 농담이 아니라 모두 재밌다니까요.
*마이클 길모어의 <심장을 찔려>는 <내 심장을 향해 쏴라>(집사재)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다. 내가 읽은 논픽션 중 최고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