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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1.28 열세 번째 이야기 中

아이들은 자신의 탄생을 신화화한다. 그것은 모든 아이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성이다. 어떤 사람을 이해하고 싶은가? 그의 머리와 가슴, 영혼을 이해하고 싶은가? 그가 태어나던 순간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해라. 당신이 듣게 될 이야기는 진실이 아닌 한 편의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 편의 이야기보다 더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없다.
-5쪽


나의 불만은, 진실을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진실 그 자체에 대한 것이지요. 지어낸 이야기와 비교했을 때, 진실이 우리에게 어떤 위안을 주던가요? 굴뚝 위에서 포효하는 곰처럼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밤, 진실이 도움이 되던가요? 침실 벽에 번개가 번쩍거리고 빗줄기가 그 긴 손가라으로 유리창을 두들릴 때는 또 어떤가요? 전혀 쓸모가 없지요. 오싹한 두려움이 침대 위에서 당신을 얼어붙게 만들 때, 살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앙상한 뼈다귀 같은 진실이 당신을 구하러 달려올 거라고 기대하진 않겠지요. 그럴 때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포동포동하게 살이 오른 이야기의 위안이지요. 거짓말이 주는 아늑함과 포근함 말이에요.
-14쪽


예의를 갖추기란 참으로 쉽지 않나? 특별한 재능이 필요치 않으니까. 다른 모든 것에서 실패했을 때 남아 있는 것이 선함이지.
-68쪽


인생은 회반죽이야. ( ) 조금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사실이 그래. 지금까지의 내 삶, 내가 경험한 모든 일들, 내게 일어난 모든 사건들, 내가 아는 모든 사람, 나의 모든 기억, 꿈, 환상, 내가 읽은 모든 것들. 그 모든 것이 그 반죽 속에 던져졌다네. 시간이 흘러 반죽이 발효했고 결국엔 검고 비옥한 거름이 된 거야. 세포의 분열과정을 거치면서 본래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지. 어떤 사람들을 그걸 상상력이라고 부르지. 나는 그것을 반죽이라고 생각한다네. 때때로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나는 그걸 그 거름 위에 심은 다음 기다리지. 나의 생각은, 한때는 생명이 있었던 그 검은 퇴비로부터 양분을 먹고 자라는 거야. 그리고 스스로 힘을 갖게 되면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지. 그러다가 어느 화창한 날, 난 하나의 이야기, 소설을 갖게 되는 거야.
-69~70쪽


다이안 세터필드의 <열세 번째 이야기>를 읽고 있다.
600쪽에 가까운 두께가 부담스럽게 하면서, 책을 펼친 순간 위와 같이, 과실의 생을 응축한 씨앗처럼 조밀하고도 단단한 진술이 어깨죽지에서 날개가 돋아 황홀한 비상으로 이끌 듯이 이야기 속으로 흡입시킨다.
그래, 이게 처녀작이란 말이지, 하고 반은 감탄하고, 반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나에게 <열세 번째 이야기>는 무슨 상관이람  하고 아랑곳않는다는 듯 도도하게 책상 위에서 놓여 있다.
알았어, 얼른 다 읽을께.







SCHUBERT: Piano Sonata No. 21 in B flat major D. 960 Andante sostenuto
Piano_ Sviatoslav Richter





Posted by H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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