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_바이올린 소나타 4번 1악장 -장례식 그날은 회색 구름이 태양을 가려 공기를 흐렸으면 좋겠다.
베토벤_현악4중주 14번 6악장
-약 2분 묵념의 그 순간
쇼팽_전주곡 4번
-쇼팽도 자신의 장례식을 상상하며 이 음악을 작곡했으리라.
그리그_페르귄트 중 오제의 죽음
-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나를 떠나보내주면 흐뭇하겠다.
BEETHOVEN: String Quartet No. 14 in C sharp minor op. 131
Budapest String Quartet
*한글날이다. 아침 회의 시간에도 누가 아름다운 한글을 쓰자고 운운한다.
아름다운 한글이라. 글씨 예쁘게 쓰라는 소리인가.
표기체계로서 한글을 잘 쓰는 건 실용적으로 유익할지 모르겠지만
무슨 글자인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면 족하지 않겠는가.
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그리고 그들이 '선의'로서 그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것도.
그럼에도 그 선의에 담긴 순결성이 거북하다.
고종석의 말을 따르자면 '걱정할 일이 아니다.'
말릴 깜냥도 없지만 시끄럽기는 하다.
여느 해처럼 올해도 한글날에 즈음해 한글 사랑의 목소리가 넘쳐 났다. 그리고 여느 해처럼, 하루이틀이 지나자 쑥 들어가버렸다. 물론 이런 ‘세시 풍속’이나마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는 한결 낫다.
그러나 한 해 동안의 무심을 몰아서 벌충하겠다는 듯 사랑의 고백을 숨차게 늘어놓은 뒤 이내 잠잠해지는 것이 그리 보기 좋지는 않다. 더구나 그 사랑 고백의 내용도 불분명하고 상투적이다. 예를 둘만 들어보자.
우선 이 애정 고백은 거의 예외 없이 한글과 한국어를 혼동하고 있다. ‘한글을 다듬고 지키자’고 외치는 사람들이 ‘한글’이라는 말로 막상 가리키는 것은 대개 한국어다.
그러나 한글은 한국어를 적는 문자 체계일 뿐이다. 한국어는 한글이라는 문자 체계와 상관 없이 아득한 옛날부터 있었다.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세종이 만들어낸 것은 한국어가 아니라 한글이다.
그러니 설령 지금의 한국어가 이리저리 고생하고 있다고 해도, 우리가 그것 때문에 특별히 세종에게 죄송스러워 할 이유는 없다.
일반적으로 어떤 언어와 문자가 필연적으로 결합하는 법은 없다. 옛 한국인들이 한자로써 한국어를 표기하는 이두나 향찰 따위를 고안해냈듯, 옛 베트남 사람들도 한자로 베트남어를 표기하는 자남이라는 것을 고안해 냈다. 지금 한국어는 한글로 표기되지만, 베트남어는 로마 문자로 표기된다.
터키어도 오래도록 아랍 문자로 표기되다가 20세기 들어 문자 혁명을 거친 뒤 로마 문자로 표기되고 있다. 한국어와 한글의 결합 역시 필연적인 것은 아니니, 이탈리아어를 한글로 표기할 수도 있듯 한국어를 로마 문자로 표기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문자는 언어의 그림자일 뿐이다. 한국어도 한글도 우리에게는 다 소중하지만, 그 가운데 더 소중한 것은 말할 나위 없이 한국어다.
다음, 이 애정 고백의 장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한글의 혼탁을 걱정했다.
물론, 실제로는 한글이 아니라 한국어의 혼탁을 걱정한 것이다. 그들은 한국어가 외래어로 더럽혀진다고 탄식했고, 인터넷 세대의 젊은이들이 한국어를 파괴한다고 한숨 쉬었다. 그러나 쓸데없는 걱정인 듯하다.
한국인들의 언어 생활에 유달리 외래어가 많이 파고 든 듯 말하는 것은 근거 없는 과장이다. 외래어 사용 취미가 별다른 일본인들은 말할 것 없고, 언어 민족주의가 굳센 것으로 유명한 프랑스인들도 우리 못지않게 외래어를 사용한다.
인터넷에서 줄임말이나 이모티콘을 남용하는 젊은이들의 ‘언어 파괴’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런 ‘명랑체’의 채팅 언어가 점잖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발랄한 언어는 그것을 사용하는 젊은이들의 일시적 해방감을 드러낼 뿐이다.
채팅 언어 때문에 젊은 세대의 한국어 문장력이 떨어진 듯 말하는 것은 엉뚱한 트집이다. 평균적으로 보아, 요즘 젊은 세대의 문장은 기성 세대의 문장에 견주어 나으면 나았지 결코 못하지 않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개인 차이일 뿐이니, 젊은 세대의 아름답고 정확한 한국어 문장을 인터넷에서 찾아내는 것은 형편없는 문장을 찾아내는 것만큼이나 쉽다.
새 세대는 늘 기성세대의 눈에 안 차는 법이다. 물론 채팅 언어의 범람과 상관없이 한국어 교육, 특히 글쓰기 교육은 지금보다 한층 더 강화해야 한다. 세대를 가릴 것 없이 한국인의 문장력은 그리 탐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쓰기 교육의 일반적 파행을 젊은 세대의 채팅 언어 탓으로 돌리는 것은 기성 세대의 비겁한 책임 회피다.
균질적인 자연언어는 없다. 모든 자연언어는 크고 작은 내적 다양성을 간직한 복합체다. 그 다양성을 이루는 요소에는 방언도 포함된다.
젊은 세대의 채팅 언어는 일종의 사회 방언이다. 경상도 방언이나 평안도 방언이 그렇듯, 채팅 언어도 한국어라는 나무를 풍성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꽃잎이고 곁가지다. 걱정할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