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은 그 내용보다 책을 읽었던 당시의 풍경으로 기억된다.
예컨대 <그리스인 조르바>라고 한다면 두 번의 기억의 풍경이 떠오른다.
대학교 1학년 여름 어느날, 싸구려 캘리포니아 와인과 오미자 엑기스를 섞어 얼음을 띄운
정체불명의 음료를 마시며 책장에 붉은 얼룩을 자꾸만 남겼던 기억 하나.
그리고 인도 맥그로드 간즈의 스님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서 낮에,
한국인 카페 리에서 빌린 <조르바>를 꺼내 읽고 있는데
갑자기 게스트하우스를 울리는 여인의 끝없는 절창, 피식 터져나오는 웃음, 그 기억.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역시 열댓번은 되풀이 읽었겠지만,
그 책을 떠올리면 고등학교 미술실에서 테레핀유와 담배 연기가 섞인 냄새,
심야 고속버스 창을 두드리는 빗방울, 헤드폰에 울리는 캐논볼 애덜리의 색소폰...
그리고 인도에서 어떤 풍경이 찾아든다.
카페 테라스에 앉아 묘하게 짠맛이 섞인 아이스커피를 홀짝이며
인도에서 그것을 말아 피며 책을 보다가 어느 순간 멍해지며 나른하게 릴랙스되는 가운데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만년설.
(예전 인도 여행을 갈무리한 걸 뒤져보니 그 카페 테라스에서 찍은 사진이 있다)
이렇게 기억의 풍경을 검색하다보면
하루키가 말한 먼북소리가 들려와 긴 여행을 떠나야 할 것 같다.
앞으로 21개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