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석의 글에 '나'를 자주 포개곤 한다.
그의 사유에 대체로 견인당하고 그의 감성에 쉬 홀리곤 하는, 그 포갬은 아마도 생래적 포갬일 게다.
그 타고난 무언가가 그에게 포개게 하는.
오늘, 한국일보에 연재되는 그의 글을 보다가 순간 따옴표 치며 나를 포개게 하는 대목이 있었다.
그래, 그렇지 하면서.
*그러고 보면 예전에 몇몇의 그네들에게 혹했을 때, 나라는 인간을 설명하겠다는 방편으로
고종석의 책을 자주 선사했더랬다. 그래서 잘 되었는가, 라고 묻지들 마소. 그럴리가 없지.
먼 곳을 향한 그리움과 고향을 향한 그리움은 어떤 낭만주의의 심리적 질료들이다. 이 둘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고향을 그리워할 때 그 고향은 그리움의 주체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게 마련이고, 먼 곳을 그리워할 때 그리움의 주체는 그 먼 곳을 제 진짜 고향으로(그러니까 자신은,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과정에 발을 헛디뎌, 태어나지 않았어야 할 곳에 잘못 태어났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나이 스물 넘어 삶과 세상에 대한 내 생각을 정돈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나는 낭만주의자가 되지 않으려 무던히 애썼다. 낭만주의의 주정적(主情的) 무절제와 허튼 몽상이 그 당사자에게만이 아니라 공동체에도 해롭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성이라 부르든 합리성이라 부르든, 나는 어떤 질서와 규율을 내 삶과 마음 속에 장착하고 싶었다. 논리의 수준에서만이 아니라 윤리와 심미의 수준에서도.
그러나 나는 실패했다. 타고난 그릇을 나는 부술 수가 없었다. 이런 실패 경험은, 사람은 어떤 거푸집에 갇혀 그 모양대로 ‘태어나게’ 마련이라는(그러니까 사람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는) 내 우파적 인간관의 핑계가 되었다. 내 생각이나 행동은 늘 넘치거나 모자랐다. 모자람도 넘침의 일종이라면(과소!), 나는 늘 넘쳤다.
특히 쾌락을 쫓아 구하는 데서 나는 절제를 몰랐다. 내 몸뚱어리를 동년배보다 한결 낡게 만든 (심한) 니코틴 중독과 (약간의) 알코올 중독은 그렇게 얻어졌을 것이다. 손 닿는 자리에 디스플러스가 없으면, 온전한 와인 병이나 먹다 남은 위스키 병이 냉장고나 선반 어딘가에 있지 않으면 나는 불안하다.
내가 탐한 것이 술과 담배만은 아니다. 나는 특정한 음식을 지독히 탐한다. 스키야키(鋤燒), 연어 회, 낙지볶음, 안심 스테이크, 생굴 같은 것들. 이 이름들을 벌여놓고 있자니 어느 새 입에 침이 고인다. 나이가 좀 든 뒤에는 달라졌으나, 한 때 나는 멜로드라마 폐인이기도 했다. 나는 하염없는 감상주의자(였)다. 이성과 합리성에 바탕을 둔 리얼리즘이 모자랐던 탓에, 나는 늘 주변인으로 살았다. 크고 작은 공동체의 변두리에, 안과 밖의 경계에 내 자리가 있었다.
그 가두리의 자리를 나는 자유의 자리로 여겼다. 그 자유는 패배의 대가로 얻은 자유였다. 그러니까 내가 일종의 낭만주의자라 하더라도, 그 낭만주의는 영웅적 낭만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패배를 예상하거나 예정한, 소극적 도피적 낭만주의다.
원문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703/h2007032718002786330.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