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네이버 블로그를 보다가 인도 여행 다니며 심심할 때 끄적여둔 하루키의 <번역야화> 중 일부.
지금 보니 새삼 곱씹게 되는 대목이 있다.(물론 사전도 없이 그냥 멋대로 번역한 엉터리다)
이 책 참 재밌게 읽었는데, 아무리 하루키라도 국내에는 안 나오겠지.

 

소설을 쓴다는 것은, 간단히 말해서, 자아라는 장치를 움직여 이야기를 만드는 작업입니다. 자아라고 할까, 에고라고 할까, 나라고 할까. 나를 추구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영역에 어떤 의미로 발을 담그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밸런스를 잃을 아슬아슬한 선까지 이를 수밖에 없으며, 바깥세계와의 접촉을 끊고 가야 할 경우도 많습니다 이정도의 위험을 감수한 작업이야만 가능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훌륭한지 어떤지는 별개의 문제로서 말이죠. 그렇지만 번역이란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텍스트가 반드시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와의 접점과 거리를 잘만 잡으면 길을 잃는다거나, 자기 밸런스가 무너진다거나 하는 일은 없습니다. 꼼꼼히 진행하다보면 대부분의 문제는 논리적으로 해소됩니다. 이러한 작업은 제게 있어 대단히 고마운 일입니다. 금세 가능하기도 하고.
- 16쪽

여러분은 누구인들, 어느 정도 자기자신의 문체를 갖고 있기 마련입니다. 많든 적든간에. 능수능란하던가, 서툴던가, 견고하던가, 견고하지 않던가 하는 것은 어쨌든 별개로 해서 말이죠. 그리고 그 문체 안에는 여러 가지 문장적 요소가 모여 있기 마련입니다. 예컨대 어휘를 어떻게 풍부하게 사용할 것인가가가 문체에 있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게고, 어떻게 하면 알아먹지 못하게 쓸 것인가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게고, 반대로 어떡하면 알아먹기 쉽게 쓸 것인가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여러 가지 요소가 있지요. 아름답게 쓰고 싶다던가, 간단하고 심플하게 쓰고 싶다던가, 재미있게 쓰고 싶다던가. 자기 나름의 원칙이라고 할까요, 문장을 쓸때 우선순위에 오는 것이 요모조모 있기 마련입니다.
내게 있어 그것은 리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리듬에 관해선, 경우에 따라선 제 나름대로 자유롭게 고쳐씁니다. 어떤 것이냐 하면 긴 문장이 있으면 세 개로 나누어 긋고, 세 개로 나눠진 문장을 하나로 만들어 버린다던가. 이 문장과 저 문장을 합쳐버린다던가.
왜 이렇게 하냐 하면, 저는 오리지널 텍스트에 있는 문장의 호흡, 리듬과 같은 것을 표층적 차원에서가 아닌, 더 깊은, 자연스러운 형태의 일본어로 바꾸고 싶기 때문입니다. 영어와 일본어의 리듬은 기초부터 다르거니와 텍스트 상의 문장을 그 형태 그대로 바꿔 번역하면 어떻게 한들 납득할 수 없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렇게 느껴지는 경우에 저는 독단적으로 바꿔버립니다. 이러한 점에서 '직역파'라고 말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대신에 그 이외에 레토릭이이나 단어 등에 대해서는 텍스트에 아주 충실하게 번역하고 싶습니다.
- 21~22쪽

예컨대 제가 카버를 번역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때만은 카버에 있어서는 대체할 수 없는 번역자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이건 정말 신기합니다. 왜냐면 번역이란 무수히 대체할 수 있는 듯하니까요. 그렇지만 그 당시는 그렇지 않으니까요. 이것에 대해 최근 고민해봤는데, 결국 엄연한 텍스트가 있고, 독자가 있고, 그 사이에 중간자로서 내가 있다, 라고 하는 삼위일체 같은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저 말고도 카버를 번역할 수 있는 사람은 무수히 있으며, 또는 저 의외에 피츠제럴드를 번역할수 있는 사람이 존재합니다. 그렇지만 내가 번역하는 것처럼은 번역할 수 없다라고 확신하는 순간이 있는 것입니다. 대체할 수 없다라는 식으로 스스스로 느끼는 것입니다. 일종의 환상입니다만.
- 26쪽

제가 소설을 쓰고있는 시점에서는, 쓰고 있는 것이 완전히 저라는 인간에게 소속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 쓰고 난 시점에서는 그 소설은 독립된 존재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즉 제가 쓴 것이 독립된 텍스트로서 세상에 나와, 그 텍스트에 엑서스할 자격은 모두 평등하다는 것. 예컨대 시바타 씨가 제가 쓴 텍스트에 액서스할 자격도, 여러분이 텍스트에 액서스할 자격도, 제가 그렇게 할 자격도 모두 똑같은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29쪽

제 문장 형성 시스템은 상당히 음악적이지요. 그래서 리듬이 없는 문장이라는 건 읽을 수가 없어요. 누군가의 문장을 읽어도 리듬이 없는 문장이라면 애당초 읽지를 못합니다. 똑같은 데를 몇 번이고 되풀이 읽게 되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번역을 할 때에는 무엇보다도 원문의 리듬을 적절한 일본어로 전환하고자 의식합니다.
- 30쪽

(소설을) 쓸 때에는 역시 음악적으로 쓰게 되요. 그래서 컴퓨터로 쓰게 되어 대단히 편해졌어요. 키보드로 리듬을 탈 수 있으니까.
- 30쪽

번역할 시에는 어떻게든 자신이라 하는 것을 버리고 번역하게 됩니다. 그런데 자신이라는 게 어지간히도 버려지지 않지요. 그래서 철저하게 버리고자 맘 먹고 난 뒤 어쩔 수 없게 남게 되는 정도가 문체로서 알맞지 않을까 싶어요. 처음부터 내 문체로 번역해야겠다라고 작정하면 그건 조금 어색한 번역이 돼버립니다. 자신을 모두 버리자고 다짐하고 버려지지 않는, 남은 부분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래서 아주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 문체라는 건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실제로는. 텍스트 안의 문장의 울림에 귀 기울이면 번역문의 형태라는 건 자연스레 결정되는 것이다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 35쪽

 

Posted by H군

작년 초니까 꽤 지난 이야기지만, 일본 아마존을 보다가 눈에 띄는 책이 있어

대충 내용소개와 독자평을 정리하여 위에 올렸더니, 특히 사장이 그 책이 꽤나 마음에 든 듯,

얼른 구해보라 하여 특급으로 받아 보여줬다.

일반인보다 10배나 빨리 늙어 평균수명이 13세라는 조기노화증 환자인 열네 살 소녀가,

항상 죽음을 예비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너무나 밝고 긍정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본인의 삶을 쓴 책.

나이가 나이다보니 내용도 쉽고, 분량도 꽤 짧다.

사장이 책을 이리저리 흝어보더니, 나 주말에 이 책 읽고 싶은데, 란다.

그러니까 나보고 번역을 해서 주라는 말씀.

하여 급하게 책을 번역하게 됐는데, 이게 참, 문장은 참으로  쉬운데 그 내용이 너무나 밝고 건강하여

번역하면서도 마음이 영 불편하다. 게다가 14살 소녀적 감수성을 담으려니 더욱.

예컨대 다음과 같은 문장.


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슬픈 표정을 짓고 싶지 않아요.
제가 웃고 있으면 모두가 행복해지는걸요.

차를 타고 갈 때, 거리를 걸어갈 때, 저를 신기하게 쳐다볼 때면
짜증내지 않고 함박웃음을 지어 보여요.
그러면 그 순간 그 사람도 제게 웃음을 지어줘요.
 



이런 표현을 옮겨 치면서 속이 니글니글거려 참 힘들다.

이 불건전하고 타락한 속물인 나라는 인간이 이런 글을 읽고 옮긴다는 건 참으로 곤욕스러웠다,

라고 아까 점심 먹으며 누군가가 그 책의 행방에 대해 물어 갑자기 든 생각.

어쨌든 그 소녀가 아직까지 건강하고 밝고 살아가고 있기를!


*사실 다큐멘터리로 먼저 만들어져 굉장한 반향을 일으켰는데 방송국과 판권이 복잡하게 걸쳐 있어

책은 국내에 나오기 힘들 듯. 뻘짓을 한게다.

*제목은 하루키의 <무라카미 아사히도는 어떻게 단련되는가>에 실린 '취미로서의 번역'에서.








Posted by H군

청춘

2006. 4. 26. 19:22

문우 언니식구넷

"스물 대여섯살 후배(작가 지망생)에게 권할 만한 책,

내 젊은 날 좋은 영향을 주었던 책 몇 권씩만 추천해 주시겠어요?"

라고 하셨길래 잠시 고민해본다.

우선 떠오르는 것들.











하루키의 초기작들 -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 핀볼> <중국행 슬로보트>

하루키가 재즈바를 운영하며 밤에 부엌 테이블에 앉아 처음 소설을 쓰기 했을 때

문장이 안 풀리자 영어로 우선 쓰고 그걸 다시 일어로 고쳐 쓰면서

글을 만들었다고 한다.

<양을 둘러싼 모험>이라는 장편을 쓰기 위해 재즈바를 닫고 전업작가로 나서기 전까지의

소설들에는 왠지 모를 밤의 공기가 배어있다. 가게 문을 닫고 부엌 테이블에서

만년필로 원고지 칸을 메워 나가는 그 심야의 기운, 일상의 공기들,

짧은 시간에 가장 경제적으로 글을 만들어나가야 했기에 더욱 심플할 수밖에 없었던

그 문장들이 읽힌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고등학교 때 처음 읽고 나도 뭔가 써보고 싶다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고종석 - <고종석의 유럽통신>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제망매>

지금은 사라진 '길'지에 연재됐던 유럽통신은 고등학생이었던 내게

'길'이냐 '말'이냐 라는 고민을 말끔하게 해소해주었던 연재물이었다.

그리고 이 책은 몇몇의 그네들에게 항시 선물했던 책이었다.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은 한국어의 에로틱함, 애틋함, 야릇함을 보여준다.

그 속살의 아름다움이라니.

<제망매>는 자신이 가장 잘 쓸 수 있는 것을 써야 한다는 것을 새삼 일깨운다.



스티븐 킹 - <유혹하는 글쓰기>

현존 작가 중 가장 많은 책을 팔아 치운 작가 리스트에서도

상단에 위치할 스티븐 킹이 쓴

이 창착론은 실하기 이를데 없는 곶감 꼬치다.

빼먹을 거리로 넘쳐나는 이 책을 읽고

어떤 이는 소설가가 되기를 꿈꿀 것이고 어떤 이는 편집자가 될지도 모른다.

나는 행복한 독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는 이 책에서 스티븐 킹이 전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 중 하나다.

"많이 읽고 많이 써라"

당신이 대단한 천재가 아니라면, 많이 읽어야 한다. 그리고 다음은 많이 쓰기.

다행히 나는 소설가의 꿈이 없기 때문에 많이 읽는 것으로 충분히 행복하다.




Posted by H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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