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용

2006. 5. 3. 15:09
얼마 전 포스트에도 썼지만 최근 작업하고 있는 것이 김용택 선생의 책.

김용택 선생이 자신의 모교인 덕치초등학교에서 2학년 아이들과 지낸

1년(2004년 2학기~2005년 1학기)의 일기를 묶은 책.

스승의 날에 맞춰 그 직전에 책을 뽑기 위해 아주 급하게 진행 중이라

안 하던 야근까지 하면서 괜히 투덜대고는 있지만

원고가 너무 재밌어서 작업하며 읽다가 몇 번이고 미소 짓는다.

여태 작업한 책 중, 예전 회사에서 만들었던 책과 바람난 여자 이후

가장 즐겁게 작업하고 있다.


다음은 원고 중의 몇 대목.


아이들과 나란히 서서 오줌을 누면 어쩐지 정답다. 오늘은 우연히 용민이하고 오줌을 누었다. 변소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참 파랗다. 용민이 고추를 슬쩍 넘겨다보려고 하니까 용민이가 몸을 휙 트는 바람에 오줌이 변소 들어오는 복도 쪽으로 나가버렸다. 복도를 지나가는 아이들은 깜짝 놀랐다.




다은이가 내 곁에서 나란히 걸으며 내 손을 잡는다. 작은 손이 따스하다. 구름 속에서 나온 햇살이 좋아 현관 밖으로 나오자 다은이도 따라 나온다.

“선생님 어디 가요?”

“으응, 햇빛 보러.”

다은이도 따라 나와 나랑 나란히 햇볕 앞에 섰다.

“아! 햇살이 참 좋다.”

다은이가 감탄하며 하얀 운동장을 바라본다. 나와 나란히 서 있는 다은이를 보며 말했다.

“다은아.”

“예.”

“나는 다은이가 좋아.”

그랬더니. 다은이도 그런다.

“나도 선생님이 좋아요.”

해가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하는 모습을 둘이 오래 보고 서 있었다. 이렇게 사람들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 다 좋을 때가 있다.




국어 시간이다. 이순신 장군이 죽어가면서 외친 “내 죽음을 알리지 마라”를 실감나게 연기하는 시간이다. 한빈이가 이순신 역이고 다은이가 병사 역을 맡았다. 총을 맞고 쓰러져 있는 부하가 “장군님!” 하며 안타까워한다. 한빈이 왈 “내 죽음을 ‘말’리지 마라.”

아이들이 책상을 치며 웃었다.




오늘도 00이와 00가 일기를 써오지 않았다. 불러놓고 왜 일기를 쓰지 않았냐고 물어보았다.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문제를 내기로 했다.

*문제-왜 나는 일기를 써오지 않았나? 맞는 번호를 말해보아라.

1. 똥배짱으로

2. 선생님이 혹 일기 검사를 안 하고 지나갈 수도 있으니까

3. ‘혼내면 혼나고 말지 뭐’ 하는 심정으로

4. 일기를 쓰지 않은 걸 알고도 그냥 용서할 수도 있으니까

00와 00이는 똑같이 다 죽어가는 소리로 “2번이요” 그런다. 우리 모두 다 크게 웃었다.




“희창아, 어디 갔다 왔어?”

“동네 한 바퀴 돌았어요.”

“혼자?”

“네.”

“왜?”

“그냥요.”

“그냥?”

“네.”

“아무도 없어?”

“네.”

강 건너 산마루에 걸려 있던 햇살도 넘어갔다. 찬바람이 분다. 운동장이 너무 커 보인다. 나는 차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희창이가 땅바닥에 금을 긋고 있는 것을 보며 말을 건다.

“희창아, 지금 혼자 뭐해?”

“그냥요.”

“그냥 뭐 허냐고?”

“그냥요.”

“그냥 뭐 허냐고?”

희창이는 고개도 들지 않고 자꾸 운동장에 이리저리 금을 긋고 있다.

“희창아, 나 간다.”

“네, 안녕히 가세요.”

운동장이 너무 커서 자꾸 슬프다. 해가 넘어가버린 추운 운동장이 너무 넓어서, 놀 사람이 없어서 땅하고 막대기하고 노는 희창이가 너무 심심해 보여서 자꾸 뒤돌아보게 된다. 희창이가 땅에 그은 선들이 훌륭한 그림이리라. 훌륭한 친구고, 아름다운 이야기고, 빛나는 말이리라.

해가 지는 장엄한 자연 속에 희창이는 홀로 있었다. 겨울바람, 나무, 하늘, 물소리, 흙, 나무막대기, 검게 일어서는 산, 어둔 하늘 별빛 아래 희창이는 있다.




<희창이의 일기>

오늘 두무 마을을 돌았다. 잠바를 입지 않아서 춥기도 했다. 난 나무막대기도 가져갔다. 학교로 갈 수 있는 길이 나오자 물이 얼어버린 데로 내려가서 이상한 것을 주웠다. 난 그걸 옆에 좀 떨어져 있던 물이 많은 곳에 던졌다. 난 그걸 막대기로 가져와서 다시 던져 물고기를 놀라게 했다. 난 거기에 모래와 돌을 던지고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무서운 개들이 있어서 학교로 갔다.

난 막대기로 내 이름을 크게 썼다. 하지만 너무 크게 써서 “강”밖에 쓰지 않았다. 다시 내 이름을 썼는데, 이번에는 작게 썼다. 내가 “희”인가 “창”인가를 쓸 때 선생님이 날 부르셨다. 난 운동장에 선하고 동그라미를 그렸다.




<다은이의 일기>

오늘은 성당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최상현 오빠가 또 우리 선생님보고 용택이라고 했다. 내가 선생님 별명 부르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자꾸 용택이라고 했다. 나는 화만 냈다. 난 우리 선생님 별명 부르는 건 딱 질색이다. 난 자꾸 분하고 화가 났다. 난 정말 최상현 오빠가 싫다. 최상현 오빠는 싸움대장이다. 내가 장난으로 한 대 치면, 세게 머리를 때린다. 난 아무도 우리 선생님 별명을 부르는 게 싫다. 듣고만 있어도 정말정말 화가 난다. 난 우리 선생님 별명을 부르는 사람은 용서 안 하고 내가 선생님 대신 반은 죽여놓을 것이다.


Posted by H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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