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답잖은 주둥아리들, 게다가 노출증 환자.
끔찍한 건 이들 중 또 대다수가 관음증 환자라는 것.
*미끌어진 욕망을 채우려는 애씀은 안쓰러움이나마 불러일으킬 뿐.
허나 스스로 좌절한 예술가연 하는 건 볼쌍 사납다. 욕망과 재능은 분명 다르다.
*욕망의 대상이 끊임없이 변하는 번잡스러움이란 얼마나 피곤한가.
H선생께서 말씀하신 소확행小確幸에 족할 수 있는 이들이 훨씬 매력적이다.
*시답잖은 주둥아리들, 게다가 노출증 환자.
끔찍한 건 이들 중 또 대다수가 관음증 환자라는 것.
*미끌어진 욕망을 채우려는 애씀은 안쓰러움이나마 불러일으킬 뿐.
허나 스스로 좌절한 예술가연 하는 건 볼쌍 사납다. 욕망과 재능은 분명 다르다.
*욕망의 대상이 끊임없이 변하는 번잡스러움이란 얼마나 피곤한가.
H선생께서 말씀하신 소확행小確幸에 족할 수 있는 이들이 훨씬 매력적이다.
바흐가 마지막으로 남긴 푸가의 기법.
미완성으로 남겨졌으며 어떤 악기로 연주하라는 명확한 지시도 없었다고 한다.
보통은 하프시코드, 피아노, 오르간 등으로 연주되며(굴드는 피아노와 오르간 버전의 연주가 있다)
현악4중주, 리코더4중주 등 다양한 버전의 연주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검색해보니 꽤 많다).
오늘은, 아침 라디오에서 들은 에머슨 현악4중주단의 푸가의 기법 9번.
*원열 군 이글루스 블로그 들어갔다가 오사카 여행기를 봤다.
보니 시간에 얽매이지 않게 일본에 다녀오고 싶어졌다.
느긋하게 시간을 낭비하며 일상과 여행이 뒤섞인 듯한.
끼니를 채울 때도 일행들에게 뭔가 다른 걸 먹여야 한다는 당위,
이동을 할 때 군소리 없게 동선의 낭비 없이 움직여야 한다는 강박,
이런 거 없이 그냥 느긋하게.
*최근의 간짜장은 왜 이리 묽어졌을까.
무릇 간짜장이라 함은 짜장과 다르게 물과 전분 없이 춘장만으로 볶여
그 끈덕거리는 질감으로 먹는 것이늘, 요새 간짜장을 시키면
그냥 짜장과 면을 분리시켰다는 것 외에 별차이를 못 느끼겠다.
간짜장조차 제대로 된 것 보기가 힘들다니.
*누군가가 "국내 호러문학장르가 커지지 않는 것은
작가와 그들을 육성하려는 출판사의 의지부족 때문이다" 라고 적은 것을 봤다.
그른 얘기는 아니다. 시장에서 안 먹히는 걸 굳이 나서 육성하려는 출판사가 쉬 있겠나.
(그런 면에서 장르문학에 파고들어 열심히 책을 내고 있는 몇몇 작은 출판사들을 보면
참으로 존경스럽고, 꼭 시장에서 살아남고 성공하여 내가 다니고 있는 출판사를 비롯한
대형 출판사들을 콧대를 눌러줬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것이 모두 출판사의 탓이라고 말하면 업계 사람으로서,
그 못하고 있음에 뜨끔하고, 그 가시돋힌 말에 아프다.
우리도 힘들다고요, 라고 신세타령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고
알*딘 서재라든가 몇몇 카페 등지에서 내뱉는 독자들의 한마디가
솔직히 가끔은 속상하다.
"거기 출판사 종이는 질이 떨어지더군요."라든가
"표지를 이따위로 해선 안 된다."라든가
"아무개 작가 따위가 잘 팔리는 게 신기하다"라든가.
아무리 잘 봐줘도 기껏 개인적 취향에 의한 판단이고
그 양반들 역시 단순한 취향의 드러냄일테지만, 역시 업자 입장에서 가끔은 속상하다.
그럼에도 사적인 자리에서 남(의 책, 출판사) 씹는데는 절대 빠지지 않는 나지만.
*텔레비전이 맛이 가기 시작했다.
켜고 약 10분 정도 화면이 뿌옇게 번지고 난 뒤에 제 꼴을 보여준다.
이 TV를 산 게 96년도였던가, 북가좌동에서 녹번동 이사하면서
비디오 함께 산 '금성' TV.
기껏해야 아침에 뉴스, 밤늦게 스포츠하일라이트 보는 게 거진다인데 바꿔야 하나.
*작년에 <괴물>을 보고 근래까지 한 편도 안 봤다가 최근 몰아치며 보다.
<황색눈물> <스트로베리쇼트케이크> <철콘근크리트> <디센트> <다이하드4> <트랜스포머>까지.
*내가 작업한 소설 <프** 브***>, 정말 정이 안 간다.
그 급속도로 진행되어 마구잡이로 이루어진 번역과 교정.
만듦새도 엉망이고, 당연하게 나온 꼴도 엉망.
게다가 이 책은 방송사와 공동제작에, 김*사 쪽 사람들까지 얾혀 있는 사공 많은 배.
여기저기 쓸데없는 요구들과 군소리들이 어찌나 많은지.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요새 책이 조금씩 팔려나간다는 것.
아, 무섭다...
*오야지가 금일 다시 상경. 이번에는 중국에 놀러간다고.
내일 떠났다가 수요일에 돌아와, 수, 목, 금을 서울에서 보내고, 주말은 누나네가 사는 천안.
인도 패키지 같이 갔던 일행들과의 술자리부터 나름 술 계획을 알차게 세우고 있던데
문제는 그 계획 속에 나도 상시 동행으로 포함되어 있다는 것.
예전 네이버 블로그를 보다가 인도 여행 다니며 심심할 때 끄적여둔 하루키의 <번역야화> 중 일부.
지금 보니 새삼 곱씹게 되는 대목이 있다.(물론 사전도 없이 그냥 멋대로 번역한 엉터리다)
이 책 참 재밌게 읽었는데, 아무리 하루키라도 국내에는 안 나오겠지.
소설을 쓴다는 것은, 간단히 말해서, 자아라는 장치를 움직여 이야기를 만드는 작업입니다. 자아라고 할까, 에고라고 할까, 나라고 할까. 나를 추구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영역에 어떤 의미로 발을 담그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밸런스를 잃을 아슬아슬한 선까지 이를 수밖에 없으며, 바깥세계와의 접촉을 끊고 가야 할 경우도 많습니다 이정도의 위험을 감수한 작업이야만 가능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훌륭한지 어떤지는 별개의 문제로서 말이죠. 그렇지만 번역이란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텍스트가 반드시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와의 접점과 거리를 잘만 잡으면 길을 잃는다거나, 자기 밸런스가 무너진다거나 하는 일은 없습니다. 꼼꼼히 진행하다보면 대부분의 문제는 논리적으로 해소됩니다. 이러한 작업은 제게 있어 대단히 고마운 일입니다. 금세 가능하기도 하고.
- 16쪽
여러분은 누구인들, 어느 정도 자기자신의 문체를 갖고 있기 마련입니다. 많든 적든간에. 능수능란하던가, 서툴던가, 견고하던가, 견고하지 않던가 하는 것은 어쨌든 별개로 해서 말이죠. 그리고 그 문체 안에는 여러 가지 문장적 요소가 모여 있기 마련입니다. 예컨대 어휘를 어떻게 풍부하게 사용할 것인가가가 문체에 있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게고, 어떻게 하면 알아먹지 못하게 쓸 것인가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게고, 반대로 어떡하면 알아먹기 쉽게 쓸 것인가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여러 가지 요소가 있지요. 아름답게 쓰고 싶다던가, 간단하고 심플하게 쓰고 싶다던가, 재미있게 쓰고 싶다던가. 자기 나름의 원칙이라고 할까요, 문장을 쓸때 우선순위에 오는 것이 요모조모 있기 마련입니다.
내게 있어 그것은 리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리듬에 관해선, 경우에 따라선 제 나름대로 자유롭게 고쳐씁니다. 어떤 것이냐 하면 긴 문장이 있으면 세 개로 나누어 긋고, 세 개로 나눠진 문장을 하나로 만들어 버린다던가. 이 문장과 저 문장을 합쳐버린다던가.
왜 이렇게 하냐 하면, 저는 오리지널 텍스트에 있는 문장의 호흡, 리듬과 같은 것을 표층적 차원에서가 아닌, 더 깊은, 자연스러운 형태의 일본어로 바꾸고 싶기 때문입니다. 영어와 일본어의 리듬은 기초부터 다르거니와 텍스트 상의 문장을 그 형태 그대로 바꿔 번역하면 어떻게 한들 납득할 수 없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렇게 느껴지는 경우에 저는 독단적으로 바꿔버립니다. 이러한 점에서 '직역파'라고 말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대신에 그 이외에 레토릭이이나 단어 등에 대해서는 텍스트에 아주 충실하게 번역하고 싶습니다.
- 21~22쪽
예컨대 제가 카버를 번역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때만은 카버에 있어서는 대체할 수 없는 번역자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이건 정말 신기합니다. 왜냐면 번역이란 무수히 대체할 수 있는 듯하니까요. 그렇지만 그 당시는 그렇지 않으니까요. 이것에 대해 최근 고민해봤는데, 결국 엄연한 텍스트가 있고, 독자가 있고, 그 사이에 중간자로서 내가 있다, 라고 하는 삼위일체 같은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저 말고도 카버를 번역할 수 있는 사람은 무수히 있으며, 또는 저 의외에 피츠제럴드를 번역할수 있는 사람이 존재합니다. 그렇지만 내가 번역하는 것처럼은 번역할 수 없다라고 확신하는 순간이 있는 것입니다. 대체할 수 없다라는 식으로 스스스로 느끼는 것입니다. 일종의 환상입니다만.
- 26쪽
제가 소설을 쓰고있는 시점에서는, 쓰고 있는 것이 완전히 저라는 인간에게 소속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 쓰고 난 시점에서는 그 소설은 독립된 존재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즉 제가 쓴 것이 독립된 텍스트로서 세상에 나와, 그 텍스트에 엑서스할 자격은 모두 평등하다는 것. 예컨대 시바타 씨가 제가 쓴 텍스트에 액서스할 자격도, 여러분이 텍스트에 액서스할 자격도, 제가 그렇게 할 자격도 모두 똑같은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29쪽
제 문장 형성 시스템은 상당히 음악적이지요. 그래서 리듬이 없는 문장이라는 건 읽을 수가 없어요. 누군가의 문장을 읽어도 리듬이 없는 문장이라면 애당초 읽지를 못합니다. 똑같은 데를 몇 번이고 되풀이 읽게 되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번역을 할 때에는 무엇보다도 원문의 리듬을 적절한 일본어로 전환하고자 의식합니다.
- 30쪽
(소설을) 쓸 때에는 역시 음악적으로 쓰게 되요. 그래서 컴퓨터로 쓰게 되어 대단히 편해졌어요. 키보드로 리듬을 탈 수 있으니까.
- 30쪽
번역할 시에는 어떻게든 자신이라 하는 것을 버리고 번역하게 됩니다. 그런데 자신이라는 게 어지간히도 버려지지 않지요. 그래서 철저하게 버리고자 맘 먹고 난 뒤 어쩔 수 없게 남게 되는 정도가 문체로서 알맞지 않을까 싶어요. 처음부터 내 문체로 번역해야겠다라고 작정하면 그건 조금 어색한 번역이 돼버립니다. 자신을 모두 버리자고 다짐하고 버려지지 않는, 남은 부분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래서 아주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 문체라는 건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실제로는. 텍스트 안의 문장의 울림에 귀 기울이면 번역문의 형태라는 건 자연스레 결정되는 것이다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 35쪽
호텔에 들어와 티비 켠 채 웹서핑을 하는데 어느 방송에서 한국에서 베낀 일본 음식물 이야기가 나온다.
새우깡, 빼빼로, 마이쮸, 17차 등의 음식물을 보여주면서 일본에서 먼저 나온 것과 똑같다라는 걸 보여준다.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니, 딱히 신경 쓸 바는 아니고,
이와 관련해서 어릴 때 기억이 떠올랐다.
일본에서 살다가 한국에 돌아와서 얼마 안 됐을 때, 한국에서 꼬깔콘이 나왔다
그런데 광고가 일본에 살았을 때 봤던 그 광고 그대로에 더빙만 바꿔서 방영.
그래서 무심코 동네애들이랑 얘기했다. 꼬깔콘 일본에서 먹었던 거고, 광고도 그대로라고.
그 소린 안 그래도 한국말 못한다고 밉상이었던 내가 스스로 주홍글씨를 찍은 격이었다.
어떻게 쪽바리새끼들이 한국보다 먼저 과자를 만들 수 있냐며 무지막지하게 구박을 당했다.
내가 참 못났었다. 그런 얘기해서 대체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지금도 못났지만, 예전에는 더더욱 못나 쪽바리새끼, 매국노 씨발놈이라는 말을 들었던 과거가 생각났던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