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이 책 번역 의뢰를 받은 게, 그러니까 2007년이다.
그해 12월에 회사를 그만뒀고, 아직까지 취직은 않고 살아가고 있다.
그 시발점인 된 책.
K선생님이 번역하신 모 책 후기를 보면
"내가 <**>을 처음 번역한 것이 1991년이었다. (...) 이번 기회에 원서와 대조하면서 다시 읽어보니 틀리거나
어설프게 번역한 곳이 적지 않았다. 그런 곳들을 뒤늦게나마 바로잡고 다듬을 수 있어서 다행이고
께름칙했던 내 마음도 한결 가볍다."
라고 쓰신 대목이 있다.
2007년에 작업했던 책이 드디어 출간 스케줄이 잡히며 교정지가 날아오기 전 K선생님이 글이 생각났었다.
그러면서 역자 후기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K선생님과 같은 대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나 같은 얼치기는 3년이 흘러도 별로 고칠 것이 없어, 안타깝다."
이렇게 말이다.
그런데 실제로 3년이 지나 보니, 고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얼마 직전에 넘긴 원고도 이부자리에 누웠다가 틀린 데가 생각 나 등골이 서늘해지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어쨌든 그런 사정으로 위 역자 후기는 써먹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썼다.
후기
근래 한일 양국에서 낙양의 지가를 올리고 계신 무라카미 하루키는 한 연애소설에서 이러한 문장을 남겼습니다.
“죽음은 생(生)의 대극(對極)으로서가 아니고, 생의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한 시기,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5년 하고도 더 오래전 제가 대학 새내기 시절, 위 문장과 마주치고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양 고개를 주억거리긴 했습니다만 과연 뭘 알고 그랬을지는 참으로 의심스럽습니다. 실상 여학생과 어울리는 상당히 드문 술자리에서 폼 잡기 위한 레퍼토리에 불과했을 겁니다. 문득 그런 레퍼토리로서도 별 효력을 발휘해지 못했다는 씁쓸한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면서, 본 작품 <MOMENT>를 처음 읽었을 때도 이 문장을 새삼 떠올렸다고 기억합니다.
솔직히 혼다 다카요시의 작품을 앞에 두고 하루키를 언급한다는 것에 독자 여러분께 괜한 선입견을 드릴까 봐 저어합니다. 한 작가를 이야기하기 위해 다른 작가를 거명한다는 것은, (집요합니다만) 다시 하루키 식으로 말하자면 페어하지 않으니까요. 그럼에도 조금만 더(라고 말씀드려도 반전 따위는 없습니다).
일본 내에서 혼다 다카요시에게 달라붙는 레테르 중 하나로 ‘하루키 칠드런’이 있습니다. 이 용어에 대해 일본 위키피디아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체와 센스, 세계관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작품에 투영한 작가들을 말하며, 구체적으로는 이사카 고타로, 혼다 다카요시, 가네시로 가즈키 등의 ‘젊은 작가의 기수’들이 이에 해당한다.”와 같이 소개합니다. 사실 혼다 다카요시를 두고 ‘하루키 칠드런 중 우등생’이라는 표현을 쓰며 비아냥거리는 평론가가 있는 걸 보면, ‘하루키 칠드런’이 가치중립적인 용어는 아닌 듯싶습니다.
그렇다면 작가 본인은 이러한 자신의 레테르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있을까요. 어림해보건대 혼다 다카요시 본인도 아마도 그러한 레테르를 인지하며 무라카미 하루키의 영향을 감추려하는 기색은 없는 것 같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씨의)문장 감각이라고 해야 할까, 그 리듬 감각을 좋아해서, 어떤 책을 읽어도 지루하다 느껴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작가가 존재하기 마련이겠지만, 저에게는 그런 작가 중 한 사람이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 씨입니다.”라는 말을 본인이 하고 있으니까요.
여기서 혼다 다카요시가 어떠한 부분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계승했고, 어떻게 극복했는지, 혹은 어떻게 굴복했는지 말씀드릴 깜냥은 안타깝게도 제게는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이런 얘기입니다. 15년 하고도 더 오래전, 인상 깊게 읽은 연애소설의 한 대목을 시답잖은 수작에밖에 써먹지 못했던 대학 새내기는 그 후로 오랫동안 그 연애소설을 쓴 작가의 팬으로 읽어왔습니다. 그리고 또 한참의 시간이 지나, 우연히 마주친 혼다 다카요시라는 작가의 작품에서 자신이 좋아한 어느 작가의 인장과 같은 흔적들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금세 혼다 다카요시의 팬이 됐고, 혼다 다카요시의 작품들을 동시대인으로 쫓아 읽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그는 혼다 다카요시의 작품을 한국어로 옮기게 된 감개무량을 이렇게 고백하는 중입니다.
일본 출판계는 단행본으로 나온 책은 후에 문고본으로 다시 나와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시스템이 정착되어 있습니다. 소설의 경우는 문고본으로 다시 출간되면서 해설을 첨부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런데 혼다 다카요시는 자신의 책을 문고본으로 낼 때 해설을 첨부한 적이 없습니다. 이는 무얼 의미할까요. 최소한 옮긴이가 이 작품에 대해 뭐라 덧붙이는 건 저자가 바라는 상황은 아닐 것입니다.
옮긴이의 어쭙잖은 군소리보다 저자 본인이 이 작품에 대해 직접 기술한 에세이 중 한 대목을 옮겨두는 편이 페어하겠지요.
“무엇에 의지하여 살아가는가, 라는 질문을 받으면 누구가 각자 나름의 대답을 준비하리라. 일, 또는 거기서 실현되는 충실감과 만족감. 가족, 그리고 그 안의 애정과 관계성 그 자체. 하지만 무엇에 의지하여 죽어가는가, 라는 질문이 날아왔을 때 쉬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최소한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다.
비아냥거림이 아니라, 내가 종교를 신봉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생과 사를 모두 포함한 일련의 압도적인 픽션을, 설령 픽션이라 할지라도 신봉할 수 있다면, 그러한 삶은 풍요롭지 않겠는가. 허나 안타깝게도 나는 신앙을 갖고 있지 않다. 앞으로도 가질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그렇기에 나는, 자신의 죽음이란 존재를 내가 살아가는 동안 어떤 방식으로든 간에 내 안에 구축해야만 한다.
<MOMENT>란 작품은, 아마 그런 이야기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사로운 고백을 하자면 <MOMENT>는 제가 처음으로 번역자로 작업을 하게 된 작품이었습니다. 2년여 전 위즈덤하우스의 호의로 이 작품과 번역자의 연을 맺고, 프리랜서라는 혹독한 노지로 내몰린 시작이 바로 그때였더랬습니다. 휴―. 어쨌든 2년 여 만에 이 원고를 읽으며 어느 대목들에서는 또 여지없이 찔끔거리고 말았습니다. 새삼 실감했습니다. 아, 난 이 작품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라고요.
몇 가지 잡다한 정보를 부기해두며 잡스러운 후기를 정리하고자 합니다.
*혼다 다카요시의 최근작은 <MOMENT> 7년 후의 이야기입니다. 제목은 <WILL>.
*<WILL>과 별개로 <MOMENT>의 뒷얘기는 다른 작품을 통해 살짝 맛볼 수 있습니다. 2005년 <MOMENT> 문고판 발매를 기념하며 슈에이샤(集英社)에서 독자의 투고를 받아, 그 중 하나를 채택, 작가가 단편소설로 만들었습니다. <MOMENT> 문고판 발매 기념 홈페이지는 아래와 같습니다.
http://www.shueisha.co.jp/bunko-moment/index.html
*<MOMENT> 문고판 발매 기념 홈페이지에는 <아무도 모른다> <걸어도 걸어도>의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혼다 다카요시의 대담이 실려 있습니다. 이 대담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아직도 <MOMENT> 영화화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다고 밝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