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건우

2007. 12. 11. 15:07
올초부터 설레발 치던 백건우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회에 다녀오다.

어제 연주한 곡은 16번, 17번, 22번, 23번.

미리 예습을  하려 했으나 전혀 못하고 16번과 22번은 처음 듣다.

16번으로 시작할 때는 다소 지루한 느낌이었고, 17번은 딱히 백건우만의 느낌은 안 들었다.

잠깐 쉬고 이어진 22번.

16번처럼 처음 들어 지루하려나 했는데, 왠걸 그 박력이라니.

그 기세에 저도 모르게 입에서 와우 하고 탄성이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기다렸던 23번.

1악장에선 솔직히 22번의 박력의 여운이 너무 남아 조금 약하다는 느낌이 살짝 들었다가

2악장부터 3악장까지 쉴새없이 몰아치며 홀 안을 장악하는 걸

청중의 무리로서, 집단의 한 명으로서 온몸으로 느껴졌다.

당연한 기립박수와 대여섯 번의 박수 호출.

집에 와서 화요일자 표를 알아봤지만 역시나 매진.

그래 금요일의 감동을 위해 기대를 응축해두자.







Posted by H군

통곡

2007. 12. 5. 15:33
예비군 훈련 나흘 동안 누쿠이 도쿠로의 <통곡>과 하루키의 새로운 에세이를 읽어야지, 라고

맘먹었다가 불의의 부상(...)에 하루키는 손도 못 대고 <통곡>도 몇십 페이지 남기고 말았는데,

오늘 다른 사람 작업을 기다리는 한량한 시간 동안 <통곡> 나머지를 해치우다.

지난 번 일본 출장 때, 회사 소개서에 그간 계약한 타이틀 리스트를 써놨는데

누쿠이 도쿠로의 <우행록>을 보고, "누쿠이 도쿠로 하면 <통곡>이지" 하는 이야기를

몇 군데 출판사에서 거듭 들어 일본에서 바로 오퍼 넣고 결국 계약한 타이틀이 바로 <통곡>.

그래서 내심 기대에 차서 훈련 기간 읽고 있었는데, 날씨도 싸늘해 죽겠는데

소설 속에서 3인칭으로 기술되는 인물들의 심리는 마른 우물처럼 깊은 공허감으로 울림을 거부한다.

마치 샌드페이퍼로 긁어 영혼이 마모된 듯한 인물들.

근데 사건은 몇십 페이지를 남겨놓고도 무엇 하나 정리되는 기색이 안 보인다.

경찰 내부의 캐리어와 논캐리어 사이의 알력, 연쇄 유아 납치 사건, 밀교의 비밀의식 등

일본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소재라 그리도 <통곡> 타령을 해댔던가, 하며 계약한 걸 살짝쿵 후회하고

이걸 어찌 포장해야 할까(는 내가 고민할 문제는 아니지만) 하면서

내년도 출간계획(역시 내가 낼 문제가 아니지만) 중 뒤로 밀어놓았었는데,

마지막까지 열 페이지 남짓 남기고 갑자기 등장하는 한마디에 망치로 뒤통수를 쿵 얻어맞고 말았다.

아, 이런 서술트릭을 준비하고 있었구나.

그 텅빈 영혼이 심연에서 터져나오는 통곡 소리가 귓가를 울려댄다.

해설을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최근 들어 누쿠이의 문장이 갖고 있는 질감과 본격이라고 하는 장르가 갖는 분위기와의 괴리가,

독자와 멀어지게 만드는 요인이라 지적되고 있지만 (그것들은 상황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타당성을

갖는 건 분명하지만) 문장 자체가 소재나 테마에 그치지 않고, 이정도로 미스터리의 핵까지 이룬 트릭과

유기적으로 결합시키고 있는 작가를 나는 알지 못한다."

유기적인 결합 여부는 모르겠지만 그 문장의 힘으로 독자를 390여 페이지까지 (이영차) 이끌고 와

마지막 몇 걸음을 기어가게 만드는 능력은 꽤나 그럴싸하다.







Posted by H군

시사 대담

2007. 12. 3. 17:52

토요일에 버스를 탔는데 뒤에서 대화가 들리는데 느껴지는 목소리의 앳됨에 비해 대화 내용이 참으로 묘하다.


1: 요새 가스비 많이 들어 큰일이야.
2: 니네 차 만땅 채우면 얼마 나오는데.
1: 22만원이 나와서 아빠가 죽겠다 하더라고.
2: 니네 차 뭔데?


아빠? 뒤돌아보니 초등학교 3학년이나 됐을려나.
요새 초딩들 모이면 펀드 얘기한다는 농담은 들었지만...
그러다 창문 너머로 대선 포스터를 본 듯.


초딩 1: 정동영은 예전에 앵커했을 때가 좋았던 거 같아.
초딩 2: 이명박이 일뜽이잖아.
초딩 1: 이명박은 시장 시절에 청계천 때문에 지금 잘 나가는 거지.
초딩 2: 음, 난 그냥 노무현이 계속 대통령 했음 좋겠어.
초딩 1: 야! 뭔소리야. 노무현이 경제를 얼마나 망쳤는데.


이들의 시사 대담을 더 듣고 싶었지만 내려야 해서 거기서 끝이 났다.
권영길, 문국현에 대해선 뭐라 말씀을 하실지 듣고 왔어야 했는데...

Posted by H군

템페스트

2007. 11. 28. 11:00
월요일부터 KBS 1FM 유정아의 가정음악에서

백건우가 나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의 연주(물론 레코딩)를 들려주고 있다.

회사에서 나지막이 틀어놓아 백건우와 나누는 대화는 알아듣기 힘들지만

연주는 쏙쏙 귀에 들려온다.

그중 어제 나왔던 17번 템페스트.

12월 10일이면 현장에서 들을 수 있다.

(10일과 14일 예매했는데, 10일은 16, 17, 22, 23번, 14일은 30, 31, 32번. )





Beethoven_Piano Sonata No.17 in D minor Op.31 No.2 "Tempest" Allegretto
Piano_Kun-woo Paik





Posted by H군

첫눈

2007. 11. 22. 22:27
며칠 전 첫눈 왔을 때 일이다.

예비군 훈련 마치고 회사에 있다가 술약속이 깨져 밖에 나와보니 눈이 펑펑 내리고 있다.

술 생각은 더나는데 어쩔 도리 없어 마을버스 탔더니 기사 아저씨가 우리집 올라가는 언덕을 올라갈 수 없단다.

중간에 내려 내친 김에 술과 안주거리를 사들고 눈길을 투덜투덜 걸어가는데

멀리 남녀가 부둥켜안고 있는 게 보인다, 이다지도 눈이 내리는데.

첫눈의 오라란 이런 건가 하며 그 경험치가 없는 나로선 알 수 없는 일, 하면서도 부럽기 이전에 경이로웠다.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하니 아무래도 십대 후반이나 갓 스물 무렵의 커플인 듯,

쏟아져내리는 눈 속에서도 그 풋풋함은 감출 길 없다.

졸지에 피핑 탐(peeping tom)이 됐지만 주책맞은 삼십대는 구경거리를 애써 지나치지 못한다.

다소 특이하게 여자 쪽이 등을 보이며 남자를 부등켜안았고 남자는 주차된 차에 등을 기대고 있는 형상.

커플은 첫눈의 감격을 술과 함께 했는지, 얼굴이 보이는 남자의 낯짝은 여드름이 더욱 도드라지게 불콰하다.

그런데 남자가 뭐라고 말을 하고 있다.  '엿보는 탐'은 이제 '엿듣는 탐'이 되고 말았다.

남자, 불콰한 얼굴로 말을 한다.

"씨발, 냅둬봐. 저 새끼 죽여버릴거야."

아, 여자는 남자의 싸움을 말리고 있었던 거다.

첫눈의 오라란.




*예비군 훈련 갔다가 발목을 삐끗하여 병원 갔더니 인대가 늘어났단다.

뼈가 다친 게 아니니 큰일은 아니지만 되도록 걷지 말란다.

그래서 회사도 안 가고 놀고 있다.



Posted by H군
오늘부터 목요일까지 출퇴근으로 예비군 훈련.

지난번 예비군 훈련 때에 비해 사람들이 (예비군 치고는) 의외로 조신하다.

역시 사대문 안 사람들이 차출되어 훈련받아 그런가...

Posted by H군

수능

2007. 11. 15. 14:26

오늘이 수능 날이긴 한가 보다.

어젯밤에 집에 들어올 때 보니 집 옆 고등학교 앞에 그 시간부터 응원 준비를 하는 학생들이 진을 치고 있다.

아침에는 나팔을 불어대고 교가(일까 응원가일까)가 수십 번 제창된다.

요란한 응원소리를 뒤로 하고 출근을 하는데 시험 잘 보라며 엄마와 누이가 껴안아 키스해주는 학생,

구석에서 친구와 둘이서 담배를 피며 긴장을 제어하는 학생,

시험 준비는 모르겠지만 추위 준비는 단단히 해온 학생 등 여러 무리가 보인다.

느닷없이 그 친구들의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그러고 한마디 해주고 싶었다.

"나도 수능 보고 대학까지 졸업했는데 이 모양 이꼴이란다.

너무들 애쓰지 마라." 라고.




Posted by H군

どんどん

2007. 11. 12. 22:54

결국 위에 말하다.

물론 모양새이자 순번에 가까운 만류의 제스츄어가 오가다가

담달 중순까지 비공개로 하는 걸로 두고 잠정 합의.

내친 김에 집도 설득하여 이쪽도 어느 정도 무마.

다시 내친 김에 이어 일을 할 만한 양반과 통화까지.



모레면 여기와 연을 맺은 지 만 이 년.

그러고 한 달하고 보름이면 끝인 듯싶다.



Posted by H군

사람을 사귀는 데 인색할 이유는 없겠지만

어째 내 인심 주머니는 꽤나 박하다.

아마도 외가 식구를 닮은 구석이리라.

집안이 손님들로 법석거려야 흥이 나는 친가 식구들과 달리 말이다.

그래서 여기서 용감하게 고백하자면 난 별로 친구가 없다.

(비겁하게 변명하자면, 꼭 내 외모 탓만은 아니다.)

그저 지금의 사람 관계에 족하거나 겨워할  따름이다.

겨워함은 단순히 물리적 체력의 문제(어제도 마시고, 오늘도 마시고 내일도 마시고 에헤라~)라 치고

족함에 대해서는, 딱 내 인품의 크기만큼 족하고 있다.

근데 내가 내 품의 크기를 헤아리지도 못하고

인간 관계에 대해 감히 욕심을 부려본 적이 드물게 있었다.(물론 연애 말고.)

그리고 그 욕심 덕에 만난 분들이 있다.

내 욕심을 거둬 포석을 깔아 돌을 이어줬던 4dr선배가 구례로 내려가서

지리산닷컴이란 근사한 뭔가를(그렇다, 뭐라 형용하기 힘든 뭔가) 공식으로 열었다.

그 뭔가의 정체는 메일 신청하기를 통해 매일매일 겪어보기를 바란다.

그간 개인적으로 느낀 맛은 '낡은 신선함'이다.

참고로 여기서 먹은 추어탕, 육회, 육회 비빔밥, 해장국 등의 맛도 낡고 신선하게 맛있다.













Posted by H군

유구무언

2007. 11. 5. 22:40
전에 만든 책은, 그 출판사에서 만든 책 중 '가장 덜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책'이라는 얘기를 들었고

이번에 만든 책은 오탈자와 말도 안 되는 문장으로 리콜이 필요한 책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편집자로서 변명의 여지가 없다.

사실 이것뿐이랴.

기획에 관여한 시리즈는 '어거지 짜깁기'에 '급조한' 시리즈라는 얘기를 들었고

아직 나오지도 않을 책에 대해 여전히 그런 '패턴'으로 표지가 나올까 우려된다는 말까지 듣고 있다.

(이것들에 대해선 다소 변명의 말을 살짝 하고 싶기는 하지만, 변명은 변명일 따름이다.)

책 만들기가 도락조차 되지도 못하는데 무슨 편집자냐.

도락의 '道'에서 이미 이탈했다.

얼른 손 터는 게 그나마 죄를 덜 짓는 거다.

그리고 즐겁게 복수하자.^^





Posted by H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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