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도 한 번 올린 적이 있고, 다들 별관심도 없겠지만, 그래도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올려본다. 혹시나 자세한 정황은 알고 싶으시면 시사모(http://www.sisalove.com/)에 들어가서 읽어보시길.
[고종석 칼럼] '시사저널'사태가 무서운 까닭
지난해 6월 한 재벌회사 관련 기사가 발행인의 지시로 인쇄 직전에 삭제된 데서 비롯된 시사주간지 '시사저널' 사태가 황당한 지경으로까지 치닫고 있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기사가 빠진 데 항의해 편집국장이 낸 사표는 즉시 수리됐고, 기사 삭제와 편집국장 사표 수리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기자들이 직무정지나 대기발령 같은 중징계를 줄줄이 받은 데 이어, 경영진은 노동쟁의의 와중에 대체 인력을 투입해 기자들의 손을 전혀 거치지 않은 잡지를 지난주에 이어 두 호째 내 놓았다.
▲ 1월18일자 한국일보에 실린 고종석 칼럼
● 노동쟁의 와중에 대체인력 투입 제작
반년 이상을 끌어오다 한국 언론사상 초유의 '완전한 대체인력에 의한 제작'이라는 살풍경을(차라리 '진풍경'을) 빚은 시사저널 사태는 한국사회에서 노동에 대한 자본의 우위가 더할 나위 없이 확고해졌음을 새삼 확인시켰다. 그러나 자본의 욱일승천 자체가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하는 판단을 이 자리에서 내리고 싶진 않다.
한 사회의 모든 가치와 동력이 자본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은 특정한 개개인의 욕망이나 윤리를 떠나서 한국사의(어쩌면 세계사의) 현단계가 짜낸 구조나 '대세'의 문제일 테다. 또 이 사태의 핵심이라 할 편집권의 귀속 문제나 대체인력 투입의 위법성(노동조합 및 노동관계 조정법 제43조는 쟁의행위 기간 중 그 쟁위행위로 중단된 업무의 수행과 관련해 채용, 대체, 도급, 하도급을 금지하고 있다)에 대해서도 시비하고 싶지 않다.
어쩌면 자본주의 사회 언론의 편집권은, 시사저널 경영진이 주장하듯, 최종적으로 발행인에게 속할지도 모른다. 또 지금 시사저널 제작에 투입된 외부인력을 이 회사의 '비정규직 노동자'라 우겨 말한다면, 이 잡지사 경영진은 법을 어기고 있는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이렇게 시사저널 경영진의 입장을 최대한 우호적으로 이해해준다 할지라도, 이번 사태와 관련해 그들은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지난 반년 이상 경영진이 보여준 행태가, 위법 여부를 떠나, 몰상식해서다.
편집국장 몰래 인쇄소에서 기사를 들어냈다는 사실 자체가 몰상식했고, 이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기자들을 줄줄이 중징계 처분한 것이 몰상식했고, 급기야 노조가 파업을 하자 다른 언론사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돼 있는 필자들을 동원해 완전히 다른 성격의 잡지를 내놓은 것이 몰상식했다. 말하자면, 이 사태 내내 시사저널 경영진이 기자들과 맞선 방식에는 기품이 없었다.
지난주와 이번 주 시사저널은 그간 정파적 치우침 없이 시시비비에 공정했던 이 잡지에 강한 정파성의 너울을 씌웠다. 그러나 시사저널 기자들이 '짝퉁'이라고 부르는 이 두 호 기사들의 본질적 문제는 그 논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품 없음'에 있다.
기실 한국의 소위 주류 저널리즘이 민주화 이후 드러내고 있는 구접스러움도 그 논조에 앞서서 그 언어의 기품 없음에 있다고 보는 게 옳을 게다. 노무현 대통령이나 정권 홍보담당자들의 기품 없는 언어는 주류 저널리즘의 기품 없는 언어가 거울 저편에 만들어놓은 짝패인지도 모른다.
지난주와 이번 주의 시사저널은 그간 논조의 공정함에 더해 언어의 기품까지 보여주었던 이 잡지의 역사에서 큰 흉터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사들의 기품 없음은 경영진이 이번 사태에 대처해온 방식의 기품 없음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 기품 없는 저널리즘 언어가 더 섬뜩
시사저널 기자들이 지난주와 이번 주 잡지를 '짝퉁 시사저널'이라 부를 때, 거기선 얼마간의 경멸감이 묻어난다. 그러나 나는 이 '대체 시사저널'이 경멸스럽다기보다 무섭다.
이 두 호는 미국 작가 잭 피니의 SF스릴러 소설 <바디 스내처>(1955)에 나오는, 인류의 신체를 취해 지구에 번식하는 외계생물을 섬뜩하게 연상시킨다. 껍데기는 영락없는 시사저널이지만 속은 '스내처(강탈자)'의 것인 이 '가짜 시사저널'이 힘겹게 저널리즘의 기품을 견지하고 있는 몇몇 매체들마저 감염시키지 않을까 두렵다.
서명숙이 만난 김훈 , '김훈 선배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오늘, 김훈 선배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어젯밤 김훈 선배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칼의 노래> 작가로 더 알려져 있지만 시사저널 후배들에게는 그저 편집국장을 지낸 선배이지요). “<짝퉁 시사저널>이 나왔다는데 이게 대체 무슨 말이냐”고 묻더군요. 컴퓨터를 배격하는 아날로그적인 양반이라서 <오마이뉴스>에 실린 제 글을 보지는 않았는데 어떤 매체의 기자가 전화를 해서 알았다구요. 오피스텔에 칩거해 글만 쓰느라고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면서, 왜 미리 얘기해 주지 않았냐고 서운해 하시더군요.
오늘 일산 김선배 집 앞 커피숍에서 <시사저널>에서 한철을 보냈던 세 사람이 만났습니다. 낮 12시에 만나서 오후5시30분이 되어서야 헤어졌습니다. 긴긴 시간 차도 마시고, 밥도 먹고, 술도 마셨지요. 아, 저는 물론 술은 아니 마셨습니다. 1월1일에 술을 끊기로 결심했으니까요(타이밍 한번 정말 잘못 잡았습니다).
김선배는 아직 <시사저널>899호는 받아보지 못했더군요. 오늘 집에 가면 와 있을 거라구요. 그러나 주변의 전언으로 대강의 내용은 알고 있었습니다.
세 사람의 ‘퇴기(퇴직한 기자의 줄임말)’는 여기 일일이 옮겨적을 수 없을 만큼 긴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주로 옛날 이야기를 많이 했지요. 새벽까지 마감하고 청진동 해장국집에서 해장하고 아침해를 보면서 퇴근했던 일, ‘청와대 밀가루 북송사건’으로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고소를 당해 검찰 포토라인에 섰던 일, 한 주 걸러 한번씩 고소장을 받아들던 일, 그보다 더 자주 언론중재위에 불려갔던 일, 걸핏 하면 사표 쓰고 칩거한 김선배의 뒷감당을 하느라 후배들이 애먹었던 일.
그러다가 김선배의 눈에 물기가 비치더군요. “내 청춘을 바친 잡지인데, 후배들이 그 어려운 시기도 넘기면서 지켜온 제호인데‘’‘” 말을 채 잇지 못하더군요.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쓰면서 너무 울어서 더는 울고 싶지 않았던지라 퉁명스레 맞받아쳤지요. “청춘은 무슨 청춘, 선배는 이미 한물 간 나이였어요. 30대인 우리가 청춘의 절정이었죠.”
김선배는 계속 우기더군요. 자기도 청춘이었다구요. 나이는 몰라도 정신적으로 청년이었던 것만큼은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김선배는 말하더군요. 편집국장하면서 굉장히 편했다구요. 실무는 몽땅 후배들에게 맡기고 자기는 편집국을 공격하는 외적만 방어했노라고.
‘외적만’이라고 김선배는 겸손하게 말했지만, 사실 외적의 출몰이 좀 잦았던가요. 그때만 해도 우리 사회에 권위주의적인 잔재가 남아 있던지라 청와대, 국정원(당시는 안기부), 검찰 에서부터 종교집단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문제를 까발린 기사에 대해 가만놔두지 않겠다고 으름장 놓는 곳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신문 방송이라는 거대한 보호막도 없는 자그마한 독립매체가 어지간히도 까불었던 셈입니다.
#“청춘을 바치고 뼈를 갈았는데...”#
술기운 탓인지 김선배는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나도 시사저널에 정신적인 지분이 있는 사람이라고. 청춘을 바치고 뼈를 갈았는데....당신들도 다 마찬가지고.” 심각해지기 싫어서 ‘뼈는 몰라도 연필이랑 지우개는 많이 갈아바쳤죠’라고 짐짓 심드렁하게 대꾸했습니다(원고지에 연필로 데스크 컬럼을 써내려갔던 김훈 선배는 책상 주변에 지우개똥을 어지간히도 흘려놓곤 했었으니까요).
‘짝퉁 시사저널’로 화제가 옮겨가자 김선배는 비통해했습니다. 수많은 정기구독자를 생각하면 결호를 내서도 안되지만, ‘짝퉁’도 말이 안되는 일이라구요. 생각만 해도 바늘로 콕콕 쑤시는 것처럼 아프다구요. 시사저널은 단순한 사적 소유물이 아니라 사회적 재산인데, 그런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푸르른 청춘과 뼈를 갈아바쳤는데, 그런 매체가 한번 세상에 나와 착근하려면 십년 이십년도 더 걸릴 텐데,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 것인가, 라구요. 이건 그곳에 몸담았던 사람들에 대한 능욕이라구요.
옆에 있던 또다른 퇴기가 말했지요. 우리가 이럴진대 거기 몸담은 후배들은 짝퉁 시사저널을 보면서 얼마나 괴롭고 모멸스러웠겠냐구요. 젊은 후배들 중에는 잡지 만드는 게 너무 신나고 좋아서 아예 집에도 안 들어가는 놈들도 있다구요. 김선배가 되묻더군요. "야, 정말 그러냐. 고놈들, 정말 이쁘다. 언제 술이나 사줘야겠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더니 급기야 김선배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카페에 들어설 때 “소설가 김훈 선생님 아니냐?”고 반색하며 맞았던 여주인은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구요(다 늙은, 또 늙어가는 남자 둘과 여자 하나가 울다 웃다 하는 희한한 풍경을 어찌 받아들일지 참 난감했습니다).
그러나 김선배는 시사저널의 오늘을 있게 만든 건 소유주도, 전현직 기자도 아닌 독자들이라고 하더군요. 그런 독자들에게 지금의 사태는 너무도 면목없고 미안한 일이고(잘잘못이 어디에 있던 간에), 하루 빨리 진품 시사저널이 나오도록 해야 한다는 게 오늘 술자리의 결론이었지요.
그러니 사태 해결을 위해 선배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든 해보자고요.
오늘날 시사저널 사태가 파행으로 치달은 원인이 편집권은 사주나 발행인 개인의 것이 아닌 편집국 구성원의 이성의 산물이라고 믿으면서 정치권력과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지켜온 <시사저널>의 오랜 전통을 지켜나가려는 후배들과 새로운 발행인과의 인식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면,그런 전통을 만들어낸 선배들 역시 원인 제공자 중 하나이니까요.
마음만큼이나 추운 겨울바람이 부는 허허벌판 일산에서 ‘퇴기’ 출신 원고 노동자-한명은 베스트셀러 작가이고 나머지 둘은 별볼일없는 프리랜서였지만요-셋은 ‘주민등록주소지’인 각자의 집으로 총총히 돌아왔습니다.
들어서자마자 친정어머니가 말하시더군요. “야, 군대서 옷 왔다.” “어머, 그래요?” “근데, 뭐 학사경고장인가 하는 것도 왔더라.”
‘군대에 온 옷’은 1월2일 논산훈련소에 훈련병으로 입소한 큰애가 집으로 부쳐온 사제 옷이고, ‘학사경고장’은 큰애가 다니는 대학에서 보내온 것이었습니다.
아, 큰애가 한창 엄마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던 시기에 김선배가 얘기했듯이 ‘뼈를 갈아’ 잡지를 만드느라 아이를 방치했고, 심지어는 ‘악마의 빚독촉 같은 마감’에 시달리면서 다른 매체보다 더 좋은 기사를 쓰겠다는 욕심 때문에 주중에는 시댁에 맡기고 주말에만 데리고 왔었지요.
안팎으로 우울하기 짝이 없는 날이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이 핑계 저 핑계로 술을 마셨겠지요. 시사저널 사태 때문에 한 잔, 아들 때문에 한 잔!
그러나 금연하면서 깨달은 진실은 담배가 풀리지 않는 원고를 대신 써주지는 않는다는 것. 지금 눈앞에 놓인 문제들 역시 한잔 술이 해결해 주지는 않겠지요.
또렷하고 맑은 정신으로, 인내심을 갖고 지켜볼 작정입니다. 내 청춘을 실어보낸 <시사저널>이 지금의 위기를 멋지게 극복하고, 내 마음의 빚인 큰아이가 제 갈길을 찾아가는 과정을.
금창태 "'짝퉁' 시사저널 보도에 명예훼손 소송"
"왜곡 주장 때문에 이념적 세력의 공격목표 돼"
등록일자 : 2007년 01 월 17 일 (수) 11 : 17
지난 5일부터 기자들의 파업이 계속되고 있는 <시사저널>의 금창태 사장이 16일 "<오마이뉴스>와 <오마이뉴스>에 왜곡된 글을 올린 서명숙 씨 등 네티즌들에 대해 명예훼손과 민사배상 청구소송 절차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또 그는 <기자협회보>가 지난 9일 발간된 899호 시사저널을 '짝퉁 <시사저널>'로 표현한 데 대해서도 추가 고소를 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7월 편집국장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삼성 관련 기사를 삭제했던 금 사장은 그 후 노동조합의 '편집권 독립 보장' 요구를 거절하며 단체협상을 결렬시켰다. 또 12월에는 현직 기자수와 맞먹는 취재, 사진, 미술분야의 편집위원 16명을 대거 위촉해 파업에 대비한 준비를 했다는 비난을 들었다.
금 사장은 지난 899호부터 편집위원 및 외부 인사들의 글로 채워진 <시사저널>을 발행 중이다.
"이 기사 빠지더라도 이해해달라 얘기했는데…"
금 사장은 이날 <시사저널> 기자들의 주장에 동의하는 독자 및 언론계 인사들이 모여 만든 '시사저널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www.sisalove.com)의 홈페이지에 '시사저널 사태의 진실을 밝힙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소송 절차와 경위를 밝혔다.
그는 "이번 사태를 <시사저널> 내부에서 합리적인 방법으로 해결해 보려했다"며 "다만 이미 다 알다시피 노동단체기관지 및 일부 경향성을 가진 시민단체 기관지들, 인터넷을 비롯한 군소 유사 언론매체들이 일방적이고 왜곡된 주장을 검증 없이 다룸으로써 저 자신이 일부 이념적 세력의 공격 목표가 되었기 때문에 이 사태의 진상을 제대로 알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 앞으로 회사 차원에서 적극 대응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금 사장은 같은 글에서 이번 사태의 발단이 된 '삼성 기사 삭제 사건'에 대한 나름의 경위를 밝혔다.
그는 "(당시) 편집국장에게 기사를 빼고 더 검증해서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그때 가서 결정하자고 했고 취재기자를 불러서 자존심을 상하지 않도록 인간적으로 부탁도 했다"며 "내가 S그룹에 오래 있었던 사람이고 000 부회장에게 업무상 신세를 많이 졌고 후배다. 그러니 이 기사가 빠지더라고 이해해달라고 인간적으로 이야기를 했다"고 밝혔다.
그는 "기사를 빼고 나서 다음날 토요일 아침에 기협회장에게 알리고 월요일에 출근하자마자 기협 대표들과 만나 경위 설명을 했고 간부들에게 이 사태를 설명하겠으니 내 방으로 오라고 했으나 안 왔다"며 "그런데 그 다음날 아침에 이윤삼 편집국장은 편집국에 작별인사를 한 뒤 제 방에 와서 사표를 내고 사라졌다"고 밝혔다.
그는 "그 후 기자협회에서는 사장 퇴진 운동을 벌이는 것은 물론 대자보를 붙이고 아침마다 제 방에 와서 데모를 하고 일부 매체에서는 저를 공격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 현재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질서를 정립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그 다음에 시사저널과 저에 대한 인신공격, 명예훼손을 시킨 언론매체와 외부세력에 대해 저의 모든 명예를 걸고 단호히 대응할 것"이라며 "사원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 사장으로서 이런 사태를 빚게 된 데 대해 진심으로 유감을 표한다. 시사저널 사태를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 가려는 외부세력의 불순한 의도를 우리는 경계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짝퉁' 시사저널에 대한 릴레이 선언 이어질 것"
금 사장은 이미 지난해 6월 <시사저널> 사태와 관련된 편집장 칼럼을 쓴 <한겨레21>에 대해 민·형사 고소를 제기했으며, 관련 사태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한 한국기자협회, 민주언론시민연합 등에 대해서도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진행 중이다.
또 지난 9일 <시사저널>의 고재열 기자가 기자들의 불참 속에 발행된 899호에 대한 품평기를 <오마이뉴스>에 기고하자 '해사 행위'를 했다며 지난 16일 인사위원회를 열어 징계 여부를 심의했다.
<시사저널>의 한 기자는 "금 사장이 계속 법적대응에 들어가면 시사모 회원들도 적극적인 행동에 나설 것"이라며 "899호부터 시사저널은 '짝퉁'이라는 릴레이 선언 등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시사모'는 오는 19일 저녁 서울 충정로 <시사저널> 사옥 앞에서 '독자들과 함께하는 시사저널 살리기 문화 콘서트'를 열 예정이다. 이날 공연에는 가수 손병휘, 전인권, 인디밴드 허클베리 핀 등이 출연할 예정이다.
강이현/기자
나도 부기해놓는다.
시사저널 899호, 900라고 감히 명명된 잡지는 '짝퉁 시사저널'이다 라고 저도 정확히 발언합니다. 저도 고소하시지요
그 분도 2005년에 8개월간 인도에 있었고, 특히 다람살라의 한국카페 리에서 오랫동안 일했다고.
그러니까 내가 다람살라에서 리 카페 드나들 때 계셨던 것.
말하다보니 인도에서 봤던 몇 안 되는 한국사람들 중에도 겹쳐 아는 이도 나온다.
한국은 이렇게도 좁구나, 라고 붐붐에게 얘기했더니
붐붐 왈, "그게 아니고 니가 아는 여자가 많은 거여" 란다.
이하 붐붐과 H군의 대화.
H군 님의 말 : '아는 여자'라는 범주가 스쳐지나가며 얼굴 본 여자까지 포함한다면...ㅎ H군 님의 말 : 글고 혹 아는 여자 많다한들 인생에 별 영양가는 업구나ㅎ BoomBoom 님의 말 : 그거야 네놈이 작업을 안하는 탓이지 H군 님의 말 : 작업도 대상에 대한 욕구가 생겨야 하지 BoomBoom 님의 말 : 넌 안생기는 게 문제야 H군 님의 말 : 아니 불특정으로는 많이 생겨ㅎ H군 님의 말 : 근데 그 사람들은 '모르는 여자'라서 문제지 BoomBoom 님의 말 : ㅎㅎ
최 혜 진 <차 례> 1. 머리말 2. 생애와 활동 상황 3. 소리의 특징 4. 사설의 특징 5. 예술사적 의의
1. 머리말 우리가 판소리를 학문의 대상으로 삼을 때 지난 시기 우리 판소리사에서 이름을 떨쳤던 명창들을 검토해 보는 작업은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판소리사의 행적을 더듬어 보면 우리에겐 가왕 송흥록도 있었고 팔명창, 오명창도 있었으며 여성 명창의 시조를 열었다고 하는 진채선도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작업은 판소리사의 선봉에 우뚝 선 명창들을 통해 우리의 면면한 판소리적 바탕이 무엇이었는지를 실감하게 한다. 그러나 한편 ‘배고픈 광대’의 설움을 이겨내면서도 평생 판소리만을 고집하고 그 예술적 성취를 보듬다 간 수많은 명창들이 그 저변에 있었음을 생각해 볼 때 우리의 명창사는 더욱 빛날 수 있다.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일세를 판소리적 정열로 불태우고 간 명창들을 발굴해 내고 조망해 주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흔히 명창이라고 할 때 그 기준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이기우선생은 그의 「명창론」 이기우, 「명창론」, ꡔ판소리 연구ꡕ, 국어국문학회 편, 태학사, 1998. 195~231면. 에서 명창의 조건을 ‘연속, 변이, 선택의 구현자’로 정의하였다. 현재와 과거를 연결하고 있는 연속성, 개인 혹은 집단의 창조적 충동에서 생기는 변이, 지금까지 남겨진 음악의 형 혹은 다양한 형을 결정하는 공동체(민중)에 의한 선택이 그것이다. 신재효는 일찍이 광대의 4가지 범례로 인물, 사설, 득음, 너름새를 꼽았는데 신재효가 명창의 조건을 광대의 내적 자질에 중요시하였다면 이기우선생의 관점은 수용층의 입장을 반영한 명창의 조건이라 할 수 있겠다. 이 두 사람의 말을 현재적 관점으로 종합하여 보면 명창의 조건은 천부적 자질과 수련, 공력의 정도, 창조와 계승, 인기도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명창의 조건에 부합하면서도 우리가 잊지 못할 여성 명창이 한 사람 있다. 안향련은 천부적 자질과 끊임없는 수련을 통해 일찍부터 인정받고 70년대를 풍미하다 간 요절한 여성 명창이다. 그녀는 명창으로 일찍이 대성했지만 완숙미를 보여주기 전에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자결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남긴 70년대에서 80년까지의 활동과 음반은 두고 두고 그녀를 기억하게 하며 소리를 아는 사람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안향련은 38세의 이른 나이에 요절한 명창이기 때문에 제자가 없다. 그러나 그녀가 제자가 없다고 하여 연속성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임방울이나 이동백이 변변한 제자가 없다고 하여 명창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녀는 타고난 성음과 여성으로서는 드문, 통성으로 지르는 목구성을 통해 힘있는 판소리를 구현하고 있다. 격정적인 목소리에 애잔한 서름조가 깃든 그녀의 심청가는 당대 최고라고 할 만하다. 아무리 천재명창으로 요절을 했다고 하더라도 예술적 성과가 미진하였다면 안향련을 주목할 리 만무하다. 그러나 그녀는 젊은 나이에 지금껏 보기 힘든 절창의 소리를 간직하였고 이러한 소리가 몇몇 음반으로 남아 있어 확인할 수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안향련은 몇 안 되는 여성 명창사의 인물로 남을 만한 가치가 있다. 마치 우리가 허난설헌이나 황진이 혹은 전혜린을 기억할 때 이들의 천재성과 삶을 불꽃같다고 여기면서 그들의 예술과 행적을 끊임없이 주목하는 것과 같다. 지금도 요절한 천재명창으로 기억되는 그녀의 삶과 예술적 성과를 조명해 봄으로써 우리 시대 명창과 여성 명창사에 새로운 시각과 방향을 주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2. 생애와 활동 상황 안향련에 관하여는 그간 단편적인 언급이 있어 왔으나 이들은 거의 모두 그녀의 음반자료를 중심으로 한 해설에 머물러 있다. 따라서 그녀의 생애를 다시 종합적으로 재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안향련은 1944년 전남 광산군(光山郡) 송정리(松汀里)에서 태어났다. 소리선생으로 이름을 날리던 부친 안기선(安基先)에게서 어릴 적부터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11세부터 18세까지 아버지에게서 소리의 기초를 닦은 후 1968년경까지 보성으로 들어 가 정응민에게 사사하면서 보성소리를 익힌 것으로 보인다. 당시 안향련이 거기에 머무는 동안 동네는 그녀를 보러 온 구경꾼들로 시종 떠들썩했다 (노재명, ꡔ판소리음반 걸작선ꡕ, 삼호출판사, 1997. 282면.)고 한다. 그런데 정응민은 1963년 67세로 타계하였는데 이 이후로는 그의 수제자로 당시 알려졌던 장영찬을 통해 연마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그러니까 1956년부터 1968년 경까지 그녀는 판소리의 기틀을 확고하게 다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때 그녀는 판소리 다섯 바탕을 모두 이수하였다. 그러나 그 중 특히 그녀의 장기는 보성소리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심청가’였다. 이후 그녀는 1968년 서울에서 열렸던 전국 국악 경연대회 참가를 계기로 김소희선생과 연분을 맺어 1970년에는 서울로 올라와 김소희선생 문하로 들어 가 수련하게 되었다. 김소희 문하로 들어가 수업한 것을 계기로 안향련은 현대적 판소리의 흐름을 깨우치고, 특히 자신의 취약점이던 말투, 표정, 발림 등 여성 명창으로서의 자세와 인기 관리법 등을 배울 수 있었다(노재명, 위의 책, 같은 면.)고 한다. 안향련의 미모와 탁월한 소리는 대중매체 시대에 인기를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큰 요인이었다. 1970년대 초반부터 1981년 그녀가 죽기 전까지 안향련은 소리판을 휩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는 KBS, MBC, TBC 등에서 많은 국악프로그램의 창극 주인공을 담당하였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틀면 국악방송에서 으레 나오는 기본 메뉴는 안향련이었다. 창극무대의 춘향이, 심청이, 황진이와 같은 주역도 모두 그의 독차지였다. 뿌리깊은나무 판소리 감상회 등 완창 판소리 공연무대에서도 그의 인기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노재명, 위의 책, 284면.)고 전해 진다. 그러나 그녀는 이러한 와중에서도 생활고에 시달렸고, 이룰 수 없는 사랑 때문에 방황했다. 정열적인 폭발이 전해지는 듯한 그녀의 소리는 삶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던 그녀는 1981년 겨울, 자신의 집에서 다량의 수면제 복용으로 자살하고 말았다. 안향련의 행적과 관련하여 필자는 1997년 10월21일 박송희 선생과 자택에서 구술면담을 실시한 바 있다. 그녀의 활동 상황을 이해하는데 소중한 자료가 되기에 여기에 인용한다.
박송희선생과의 면담 자료 안향련이에 대해서는 내가 생활은 모르지만 향련이는 그 때 부산에서 활동을 많이 했어. 옛날에 즈그 아버지(안기선)에게 소리를 배웠는데 그 때 세종상이라는 게 있어. 세종상이라는 게 나왔을 때 부산에서 안향련이가 온 거야. 목이 좋고 소리를 하는데 이 세상에서, 이 서울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소리야. 우리가 다 들었을 때 다 그랬어. 다 사람들이 놀랬어. 그래서 김소희씨가 욕심이 나서 제자 삼았잖아. 올라 와라. 안기선씨는 젊어 돌아 가시고. 근데 저것이 안기선이 딸이라드라 그래서 관심있게 봤지. 지금 성창순이는 60이 넘고 숙선이(안숙선)도 나이가 50이니까 그게 언니 언니 했으니까 젊었지. (당시 안향련은 25세였음) 그 때 세종상이라는 게 있었어. 그 때 장영찬이도 일등을 했던가 하고, 그 때 왔을 때 들어보니까 기가 맥히게 잘 하더라고. 그 때 장영찬이가 일등한 것만 생각나지 가는 잘 모르겄어. 원칙은 그런 상이 진짜로 있어야 되고, 걔가 서울에 온 동기는 그래갔고 왔을 거야. 그래서 김소희씨랑 모도 서울로 와라 서울로 와라 그래서 서울로 와서 김소희씨한테 제자가 되서 굉장했어. 서울에서 활동을 했지. 조상현이도 그 때 왔었고. 그래서 TBC 서소문에 있는 TBC, 나도 인제 연극(창극)을 하니까 그 때 나도 인제 장화홍련전 하면 어머니 역할을 했고 또 뭐하면 내가 어머니 역할로 많이 나갔고. 그 대통령이 바뀜서 뺏어 갔잖어.(방송국 통폐합 사건) 그 때 잘 나가다 방송국 뺏어 가는 바람에 우리가 못해 부렀지. 그래가지고 문화방송 광화문에 있었지? 거기 있을 때 ‘내강산 우리노래’라고 막 이렇게 했었지. 얘는 인제 그 때 굉장히 방황을 했어요 서울에 와서. 돈도 없고 한창 젊을 땐데 얘는 또 어쩐 수가 있는고 하면, 예를 들어서 이렇게 저를 옹호하려고 하면 안해요. 또 기분파가 되어 가지고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맞부딪쳐 살려고 그러지 그런 사람 필요없다 이거야. 그래가지고. [필자:남자들이 많았다고 그러던데요?]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여. 방황을 했지. 사람이 안그래 서울에 와서 살라니까 이 사람을 만나봐도, 돈많은 영감을 만나야 돈을 펑펑 쓰고 그러지 지가 마다고 하니까 그런 사람을 못만나고 기분에 맞는 사람 만나니 무슨 돈이 있어? 그러다본께 다 부인있고 그러니 헤어지게 되고, 또 이 사람을 만나 봐도 안 되고 그러니 사람이라는 게 이 팔자가 험할라면 그래갔고 팔자가 그렇게 되는 거야 아마. 얘는 돈을 모르는 거야. 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은 와서 다 자가용 놓고 빌딩을 얻고 야단인데 왜 너는 그러냐 하면 다 필요없다는 것야. 돈을 갖다 싸 줘도 마다한다 이거야. 그애 소리를 잘하니까 안향련이 안향련이 그랬잖아. 그래갔고 아천이라는 그림그리는 사람을 만나갔고 지가 독차지 할래다가 그렇게 오산이 된거야. 남의 부인있고 자식있는 사람을 독차지 할려고 하면 되겠어. 지 팔자가 그랬는지 누구를 놀래킬라고 했는지 술먹고 약먹고 이런데다 집은 겨울인께 훈훈한 데서 그렇게 해서 가버린 것 같애. 사람을 놀래킬려고 하면 약을 먹었것어. 근데 그런게 지 운명이지. [필자:그럼 그 전에 안향련은 김소희선생께 와서 뭘 배웠나요?] 춘향전 다 배왔지. 오래 있었지. 그래 방황을 했지 좀. 그런데 벌써 얘는 소리 연마가 되어갔고 온 사람이여. <아버지한테?> 아버지한테도 배우고 딴 데서도 배우고. 저 보성가서도 배우고 그랬다고 그러더라고. 정응민씨한테. 정권진씨 아버지한테. 또 광주서도 배우고 그래갔고. 그 때는 소리한 사람이 많으니까. 또 장영찬이 한테도 많이 배웠어. 야가. 장영찬이가 정권진씨 아버지 정응민씨한테 가서 제대로 소리를 배우고 왔다는 거야. 그래갔고 장영찬이한테 배웠어. 이 보성에 정응민씨는 소리를 가르칠 때에 애소리, 중학교소리, 대학교소리, 대학원소리 이렇게 분별해서 가르쳤다고 나 어릴 때부터 그런 이야기가 있었어. 나도 그 선생님 소리를 좀 했었지만은. 그 때 당시에는 요즘 소리같이 그렇게 안해요. 소리가 무겁고 그런디. 요즘에 인자 성우향이가 거기서 배운 소리를 많이 퍼뜨렸지. 인자 조상현이도 거그서 배우고 성창순이도 거그 다 아니야? 쟁쟁한 사람들이 그런께 그냥 그 소리가 다 차지하고 있지 서울 시내에. [필자:그럼 안기선씨란 분은 어떤 분이세요?] 안기선씨 소리 잘했지. 인제 그냥반 선생이 누군 줄은 우린 몰랐지. 그렁께 광주 있으니까 우리가 인제 그양반을 독선생을 들여 갔고 몇이 짜고 좀 했었지. 어렸을 때. [필자:그럼 그 때 그 분한테는 뭐를 배우셨어요?] 그 때도 흥보전을 그렇게 많이 가르쳐 주데. 흥보전을 배우고 춘향전 ‘앉었다 일어나’ 이런 거 모두. ‘기산영수 별건곤’. 어렸을 때는 고런거 초압을 많이 배웠거든. 어리니께 누가 이별가를 가르쳤겄어. 그당시 어른들은 애들 소리를 가르쳐도 다 애들 수준에 따라 가르쳤다고. 요즘에는 쪼그만 것이 나와서 이별가 하고 또 사랑가 하고. 우리는 어렸을 때 사랑가 안 해요. ‘아버지 듣조시오’ 효도스런 그런 소리 배웠고 그렇게 하제. 요새같이 느닷없이 뺑파 ‘양식주고 떡사먹고’ 막 요런 걸 안갈키고 우리는 어른들이 가르칠 때는 수준을 봐갔고 가르쳤지. 요새는 젊은 사람들이 선생이 많으니까 아무데라도 가르쳐뿌러. [필자:김소희씨는 안향련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요?] 얘는 아주 천구성을 타고 났다고 그랬어. 얘는 아주 목은 천구성을 타고 나서 곡만 붙이면 소리가 된다. 그리고 재주도 있어요. [필자:김소희씨가 그당시 아끼던 제자가 누구였나요?] 아끼던 제자가 안향련이여. 죽어부렀으니 나는 제자복도 없다고 그랬다고. 또 김동애 얼마나 학처럼 예쁘게 잘 생기고 그런 제자도 죽어버렸잖어. 병이 들어서.
박송희 선생의 증언을 토대로 해 보면 안향련의 부친 안기선은 광주 일대에서도 소리선생으로 이름이 있던 인물이었던 듯 싶다. 당시 광주에서 소리를 공부하던 사람들이 그를 독선생으로 모실 정도였으니 말이다. 안향련은 이러한 부친 밑에서 기초를 착실히 닦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녀의 가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안기선은 자신의 딸을 애초부터 그 자질을 인정하고 교육시켰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슬하에서 공부시키던 딸을 그당시 가장 이름있는 정응민씨에게 보낸 것이 그렇다. 정응민은 일체의 창극 활동을 하지 않고 그의 고향인 보성에 묻혀서 후학들을 양성하는 데만 매진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그의 고집 때문에 그의 문하에서는 걸출한 명창이 많이 배출되었다. 현재까지도 그 명성을 굽히지 않는 조상현, 성창순, 성우향 등이 바로 그의 제자들이었다. 안향련은 이들보다는 약 10여년 늦은 연배인데 그녀가 수련한 보성시기의 절반 이후는 장영찬의 소리로 학습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그녀의 보성소리는 장영찬에 의해 절차탁마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장영찬 (박황, ꡔ판소리 소사ꡕ, 신구문화사. 1974. 여기저기 참조.)은 1930년 전남 곡성군 옥과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송만갑의 맥을 잇고 있던 고종시대의 명창 장판개였다. 그러나 그가 8살 무렵 협률사로 지방을 떠돌던 부친이 죽었으니 그가 아버지에게서 수업을 받지는 못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명창의 피를 타고난 덕에 그는 일찍부터 소리의 재능을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14살 때 임방울에게 2년 간 수업을 받으면서 소리의 길에 들어 서 1946년 국극사에 입단하였다. 국극사 제1회 작품인 「선화공주」의 남주인공 마동역으로 일약 명성을 떨치고 1952년 국악사에 참여한 이후로 더욱 인기가 높아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 자신의 소리가 짧음을 느껴 1957년 28세의 나이로 정응민의 지침을 받아 심청가와 춘향가, 수궁가, 흥보가, 적벽가를 이수 전공하여 일가를 이루게 되었다. 그런데 장영찬은 1958년 군에 입대하면서부터 판소리 연마를 쉬게 되고 또 국악단 악사로 약 2년간을 보내었다. 그가 광주로 내려 가 공대일에게 다시 약 1년여의 수련을 거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시기 아마도 안향련을 가르친 것이 아닌가 한다. 즉 그가 광주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1963년부터 1965년 사이에 정응민의 타계와 함께 장영찬과 안향련은 사승관계를 맺었을 것으로 본다. 이후 1965년 국립창극단 단원으로 활약하면서 그의 무대는 서울로 옮겨지게 되었고, 1968년 전국 국악 경연대회에 참가하면서 대통령상인 세종상을 수상하였다. 이러한 장영찬과의 사승관계는 안향련이 서울에서 활동하기 직전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장영찬에게서 그리 큰 영향을 받았다고는 보기 어렵다. 다만 1965년 전 약 1~2년에 걸쳐 사사를 받았으며 이후 장영찬은 서울로, 안향련은 부산을 무대로 하여 활약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안향련의 사승관계에서 가장 큰 줄기로 작용하는 것은 역시 정응민인 것으로 보이는데 이후 장영찬과 김소희의 문하생활을 계기로 음역을 넓히고 기교를 세련화시켜 나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장영찬은 수리성이긴 하였으나 몸이 쇠약하고 힘이 없어 목도 잘 쉬고 성량도 부족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는 안향련의 소리와 비교해 볼 때 크게 다르다. 안향련은 타고난 목으로 아무리 소리를 내질러도 목이 쉬거나 거칠어지지 않았고 완창시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내지르는 소리를 할 정도로 그녀의 성량은 풍부하였다. 그녀의 완창 녹음을 들어 보아도 그녀의 소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조금도 혈기가 수그러지지 않는 왕성한 힘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안향련은 장영찬에게서 어떠한 면을 영향을 받았을 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그가 판소리 연마에 공백기를 갖고서 공대일에게 수업을 받은 시기와 안향련과의 사승시기가 비슷하게 맞물려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안향련이 받은 수업과 영향은 거칠고 힘있는 그녀의 소리를 보다 정교하게 가다듬기 위한 기교적 측면의 수업을 받은 것이 아닐까 한다. 따라서 박동실의 소리를 충실히 전해 받은(특히 심청가에서) 공대일의 서편소리의 장점을 습득하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서편소리는 서름조에 가깝고 슬프게 질러 부르는 것이 특색인데 이러한 방식을 안향련에게서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응민의 보성소리와 장영찬의 소리를 이어받은 안향련은 서울로 올라 와 김소희의 문하로 들어 가면서 또 한 번의 질적 변화를 겪었다고 할 수 있다. 김소희식의 유장한 판짜기와 세련되고 우아한 발림 등을 배운 것이 그것이다. 김소희 문하에서는 그간의 공력을 바탕으로 한 기교화, 세련화가 진행되고 여성명창이 가지는 절제된 감정과 섬세한 표현력 등이 추가되었던 것이다. 김소희에게서는 춘향가 전바탕을 이수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현재 남아 있는 심청가나 흥보가는 전적으로 김소희제를 바탕으로 삼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이전에 배웠던 자신의 창 속에 김소희제의 좋은 장점만을 선택, 취합함으로써 더욱 개성있는 자신의 심청가, 흥보가를 만들어 내었다. 이러한 그녀의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김소희의 후계자로 지목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안향련은 예술적 성취에서 오는 외로움과 고독을 달래기 위해 방황을 해야 했다. 당대의 여성 연창자들이 으레 취하는 돈많은 남자를 잡는 데 혈안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광대들의 배고픔을 후원해 줄 사람을 찾는 길만이 예술을 계속해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던 사람들과 달리 생활고에 허덕여도 사랑하는 남자를 소유하고 살고자 했던 삶의 열정이 결국 그녀를 자살에 이르게 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그 당시는 80년 군부독재의 정권이 바야흐로 언론감시와 방송국통폐합의 위기 상황으로 치닫고 있을 때였다. 그나마 여러 방송국에서 국악프로를 하던 것이 거의 없어지게 되고 이제 소리꾼들은 또다시 밀려나고 말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함께 생활고는 다시 가중되고, 그녀를 지탱해 줄 삶의 희망인 사랑하는 사람마저도 다시 가정으로 되돌아 가버렸다. 이러한 생활이 실제 견디기 힘들었는지,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불러 오려는 쇼였는지 속단할 수는 없지만 그녀의 그러한 정신적 방황은 끝내 예술적 성취로 승화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삶에서 고통을 느꼈던 만큼 그녀의 소리는 서슬 푸르게 갈고 닦였음에 틀림없다. 화려하면서도 웅장하고 서름으로 목놓아 울면서도 긴장되는, 절제의 힘을 강한 인상으로 남기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전설처럼 안향련의 불꽃같던 생애를 자꾸 반추하게 되는 것인지 모른다. 안향련은 죽기 전에 여러 가지 음반을 취입했다. 그는 여러 명창들과 함께 1974년 아세아레코드에서 창극 장화홍련전 음반을 냈고 1970년대 초반 현대음반에서 창극 춘향전과 심청전, 남도민요 음반을 취입했다. 그리고 1975년 오아시스레코드에서 신민요 독집을, 1977년에는 아세아레코드에서 김화자,박계향과 함께 신민요 음반을 1979년에는 서라벌레코드사에서 신작판소리 열사가 음반을 냈다. 그리고 세상을 뜨기 1년 전인 1980년 오아시스레코드에서 정규음반으로는 유일하게 그의 판소리 독집인 심청가를 남겼다. 그러나 이 심청가는 수궁풍류부터 심봉사 눈뜨는 대목까지 약 1시간 정도의 다이제스트 소리이다. 한편 1980년 무렵 그녀는 KBS에서 심청가와 흥보가 완창 녹음을 남겼는데 그녀가 남긴 음반 중 가장 절창이라고 할 만하다. 필자는 1997년 경기대 김헌선교수로부터 이 귀한 자료를 건네 받았다. 그녀가 불렀던 심청가와 흥보가의 전바탕을 감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너무나 귀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중 흥보가는 놀부가 제비후리러 가는 대목 이후가 없다. 그러나 그녀가 불렀던 소리가 어떠했는지를 알아보는 데는 충분하다고 여겨지므로 여기서 흥보가까지를 거론해 보고자 한다.
3. 소리의 특징 여기서는 KBS 완창녹음인 심청가와 흥보가를 자료로 삼아 안향련 소리의 특징과 그 사설을 구체적으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다음의 말은 안향련 소리의 특징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어 참고가 된다. 안향련의 소리는 격정적이다. 그런 만큼 그가 격렬한 슬픔을 노래할 때는 청중을 전율케 하는 힘이 있다. 이는 청아한 애원성이나 궁상맞은 설움조가 아니라, 수량이 많고 낙차가 큰 폭포라든가 집중호우 같이 쏟아 내고 퍼붓는다는 말이다. 가령 심봉사가 죽은 곽씨를 부여안고 마른 땅에 새우 뛰듯 실성발광하는 대목은 그 처절함으로나 천부적 기질로서나 안향련을 당해낼 명창이 없다. 이것은 수련이나 공력과는 또다른 일종의 신들림 같은 것으로, 무엇에 ‘씌우지’ 않고서야 어찌 이럴까 싶다. 그래서 무섭게 몰두하는 그의 성격과 돌연한 죽음이 지귀심화를 떠올리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판소리는 결국 ‘목놀음’이다. 기교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나 우선 목구성이 출중해야 대명창이 될 수 있다. 안향련의 목은 맑으면서도 상중하성을 거침없이 구사할 수 있는 천구성을 지녔고, 거기에 소리의 질감을 더해주는 거칠음-수리성을 함께 가졌다. 이 거칠음은 맑은 소리를 가벼이 뜨지 않게 하는 중량감과 함께 투박한 질감으로 호소력을 갖게 하는 요소이므로 판소리에서는 중요하게 친다. 따라서 이 두 요소, 천구성과 수리성을 갖춘 소리는 힘차고 긴장감이 감돌지만, 너무 거칠면 듣기에 힘들고 피곤한 멱따는 소리가 되고 만다. 그의 목은 단연 최고다. (배연형, 「국악 명반을 찾아1 / 안향련의 ‘심청가’」, ꡔ월간 객석ꡕ 4월호, 예음, 1991. )
성음은 길, 장단과 함께 판소리 음악의 3요소로 불린다. 이 세 가지의 음악적 요소가 완벽하게 구사될 때 판소리다운 음악으로 평가받는다. 판소리에는 음악을 결정하는 극적 상황과 사설이 있으므로 성음도 일단 그것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가령 기쁜 정경을 묘사할 때는 밝은 음색으로, 슬픈 장면을 묘사할 때는 어두운 음색으로 노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같은 멜로디가 발성에 따른 음색에 의하여 그 음악적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을 가리키므로 가령 ‘성음부터 틀렸다’라는 말이 있듯이 성음은 판소리의 음악적 3요소 중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꼽힌다.( 백대웅, ꡔ다시보는 판소리ꡕ, 어울림, 1996. 258면. ) 안향련은 타고난 천구성에 수리성의 음색을 가미한 명창이다. 그리고 그녀가 질러 내는 듯이 부르는 서름조에 가까운 소리는 계면조 바탕에 선율 하나 하나를 긴장시켜 부르는 보성소리의 특성에, 통곡하는 식으로 장단을 던져 놓고 슬프게 질러부르는 동편소리의 특징이 독특하게 가미된 결과이다. 따라서 그녀의 심청가는 울부짖는 듯한 절규에 가까우면서도 통성으로 끌어 올리는 큰 격정이 느껴지는 것이다. 안향련의 성음이 힘차고 격정적이면서도 서름조를 포용하고 있다는 것은 그가 보성소리에서 장영찬의 소리로 이어져 김소희의 소리로 다듬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안향련의 시김새를 보자. 시김새란 선율의 장식적인 기교를 지칭하는 말이다. 민요에서는 단순하게 구사되던 장식음이 판소리에서 예술적 극단으로 발전하면서 사설의 이면에 맞게 시김새를 구사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이를테면 천변만화의 폭포수를 노래할 때 마치 그 음악만으로도 폭포수를 연상할 수 있을 만큼 폭포수의 모습을 음역으로 표현하게 된다. 안향련의 시김새는 너무 장식적인 데로 흐르지 않으면서도 소리의 이면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초기 명창들에게선 볼 수 없는 이러한 시김새의 구사는 현대로 올수록 점점 발달하고 있는데 이는 성음에서 부족한 부분을 시김새로 보충해 보려는 혐의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안향련은 중하성으로부터 최상성에 이르기까지 넓은 음역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힘있는 통성을 통해 내지른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내는 시김새는 소리의 감칠맛을 더해 주기도 하며 때로는 애절한 꼬리를 물고 이어지게 한다. 시김새는 특히 서편소리꾼인 김채만이 잘했다고 알려졌는데 그의 제자 박동실에 이어 공대일을 사사한 장영찬이 영향을 준 바가 크다고 본다. 그리고 한편 김소희의 섬세한 시김새를 이어받은 것으로도 보이는 데 특히 여성 명창들이 시김새의 구사에 열중하는 추세를 보면 안향련의 정교하면서도 대범한 시김새는 이 두 스승의 장점이 잘 조화된 결과로 보인다. 한편 보성소리는 ‘대마디 대장단’을 쓰는 동편소리와 달리 부침새가 많이 발달한 것이 특징이다. 부침새는 이를테면 리듬적 기교를 말하는데 소리를 정박에 놓지 않고 비껴서 미묘한 리듬의 효과를 노리는 것을 말한다. 정정렬이나 정응민 등은 목이 짧고 궂어서 다른 쪽으로 음악성을 보강했는데 이 때 정교한 부침새가 동원되었다. 이러한 부침새의 효과 때문에 명고수가 필요하게 된다. 정응민은 ‘성대가 좋지 못하여 많은 청중을 휘어잡지는 못하여도 조용한 소리 좌석에서는 일류 고수가 아니면 능히 응고할 수 없는 다단하고 복잡한 기예를 부려, 어느 누구도 당해낼 수 없는 대가였다’ (박황, 앞의 책, 131면. )고 하는데 이는 바로 부침새의 기교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응민 아래에서 수업한 안향련이 엇부침의 기교를 능란하고 정교하게 구사하고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안향련의 소리를 들어 보면 가끔 북이 이 부침새를 잘 따라오지 못함을 들을 수 있는데 이 때의 고수가 누구인지는 미상이나 아마도 일류고수는 아니었을 성 싶다. 안향련이 기초를 닦은 보성소리는 특히 판소리 중에서도 성음을 중시하는 소리지상주의로 이어졌다(최동현, 「보성소리의 판소리적 지향」, ꡔ소석이기우선생 고희기념논총ꡕ, 한국문화사, 1995, 38~39면. )고 한다. 판소리는 소리 외에도 아니리, 너름새 등의 요소가 상호 상승적으로 결합하여 이룩되는 예술임에도 보성소리는 ‘중요한 것은 소리’라고 단정짓는다. 그래서 보성소리의 전승자들은 대개 그대로 뻣뻣이 서서 소리하는 것이 예사라고 하는데 이러한 보성소리의 단점을 안향련은 뛰어 넘고자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활동했던 많은 창극적 공연은 그녀에게 연극적 기량을 심어주었고 이를 통해 보강한 너름새는 김소희의 유장한 발림에 고무되어 미모와 함께 더욱 빛났던 것이다. 이렇게 안향련의 소리는 당대 최고의 스승을 통해 그들의 장점을 선택하여 자기 것으로 소화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안향련의 소리는 천부적 자질을 타고 났지만 그의 기량은 각고의 노력의 결과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녀의 소리는 정응민의 것도 장영찬의 것도 김소희의 것도 아닌 안향련만의 소리이다. 그 모든 것이 들어 있으면서도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소리의 개성화가 이루어진 셈이다. 여기에 안향련이 천재적 명창임을 자신하는 이유가 있다. 이러한 그녀의 동편적 꿋꿋함과 서편의 설움이 뒤섞인 소리의 특징은 혼신을 다해 빚어내는 서슬로 표현되면서 더욱 가슴을 저미게 한다. 특히 심청가의 경우 비장한 부분이 많은데 이 때 안향련의 소리는 폐부 깊숙히 울림을 주어 절로 눈물을 자아내게 한다. 그만큼 그녀의 소리는 절대적인 호소력이 있다.
4. 사설의 특징 안향련의 소리가 스승의 소리를 받았으되 자신의 것으로 갈고 닦기에 노력한 점을 발견했던 것처럼 그녀의 사설을 검토해보면 사설 역시 예외가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된다. 그녀가 KBS에서 남긴 심청가와 흥보가는 그녀의 기량이 최대한 발휘된 것인 동시에 사설 전편을 어떠한 식으로 짜서 불렀는지를 확인하게 해 준다. 특히 아니리 부분에서는 많은 차이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녀가 배운 소리바탕을 중심으로 하긴 했으되 사설은 거의 자기 식으로 고쳐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자기가 좋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더 늘리거나 또는 안좋다고 느끼는 부분에서는 빼었음도 알 수 있다. 이처럼 사설의 수용에도 안향련은 보수적이었다기보다는 창조적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이러한 것은 심청가에서 두드러지는데 여러 군데에서 그녀는 사설을 적극적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 항목을 달리 해서 살펴 보고자 한다.
1) 심청가 안향련의 유일한 완창 판소리인 이 심청가는 강산제 심청가 사설을 바탕으로 하되 김소희제의 사설을 군데군데 수용하고 있다. 특히 사설구조면에서 볼 때 강산제 사설과는 조금 다르게 비장일변도로 사설을 짜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강산제 창본의 경우 사설면에 있어서 서편제의 간략, 미흡했던 부분을 보강하고 구체적이며 자세한 내용으로 사설이 확대되었다. 또 묘사에 있어서도 전반부는 비장의 극대화가 후반부는 골계의 극대화가 일어나고 있어 판소리의 사설이 흥미를 지향하는 쪽으로 변화하였음을 알게 한다. 강산제의 심봉사는 희극적이면서 낙천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뺑덕어미의 등장을 축으로 하여 심봉사는 골계적인 인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19세기 이후 판소리 청중의 중요한 부분으로 양반층이 개입되면서 평민 의식을 담당했던 사설의 주요한 내용들이 세속적 흥미를 지향한 결과로 해석된다. 따라서 강산제 창본의 특징은 심봉사 성격의 이중적 분열상으로 나타나고 심청이 보조자적 위치에 머무르는 데에 있다. (최혜진, ꡔ심청가 창본 비교 연구ꡕ, 숙명여대 석사학위논문, 1993. 119면. ) 이러한 강산제 심청가의 서사구조를 유지하면서도 안향련은 심봉사의 성격을 마지막까지 골계화시켜 놓지 않고 전편을 비장하게 끌고 간다. 특히 후반부 사설의 경우 심봉사의 비속화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심청의 모습도 최대한 숭고한 비장이 이루어지도록 하고 있으며 교훈적 사설을 많이 수용하고 있다. 대표적인 특징 몇 가지를 거론해 보고자 한다.
심청이 곰곰 생각허니 부친을 아예 속일 수가 없느니라 (진양) 진지상을 물린 후으 사당으로 하직을 간다. 후원으로 돌아를 가서 사당문을 가만히 열고 통곡하며 하는 말이 삼대 할아버지 삼대 할머니 그 직차 불쌍한 우리 어머니 불효여식 심청이는 애비눈을 띄우랴고 남경장사 선인들께 삼백 석에 몸이 팔려 인당수 제수로 죽으로 가옵니다. 일로 좇아 조종향화를 끊게 되니 불승난감하옵니다. 사당문을 가만히 닫더니만 부친 앞으로 우르르르 달려 들어 부친 목을 안고 엎더지며 아이고 아버지
위의 사설은 서편제의 맥을 이은 김소희제의 영향으로 보이는 데 심청이 인당수로 가기 전 사당에 가서 하직인사를 드리는 장면이다. 심청의 행위에 대한 비장감을 더욱 고조시키기 위해 서편제 사설을 수용한 것이다. 한편 심봉사의 행위에 있어서도 그러한 비장은 일관되게 유지된다. 뺑덕이네가 심봉사를 버리고 황봉사와 달아나자 심봉사는 한바탕 욕을 해대고 다시 길을 떠나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 보성소리이다. 그러나 안향련의 사설에서 심봉사는 인간적 처절함이 아주 극명하게 드러나도록 그려져 있다. 심봉사는 뺑덕이네가 도망한 것을 알고 길을 떠나면서도 여전히 뺑덕이네에 대한 미련을 떨쳐 버리지 못하면서 인간적 상실감과 배신감을 서럽게 느끼고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측면에서 안향련의 심봉사는 서편제의 심봉사에 근접해 있다.
(진양)주막 밖을 나서드니 그래도 생각나서 섰던 자리에 펏석 주잕더니 아이고 뺑덕이네 뺑덕이네 뺑덕이네 뺑덕이네야 뺑덕이네 뺑덕이네 무지하고 무정한 년 네 그럴 줄 내 몰랐다. 에이 천하 무정한 년. 눈뜬 가장 배반키도 사람힘으로 못할텐데 눈어둔 날 버리고 네가 무엇이 잘 될소냐 잘 살어라. 바람만 우루루 불어도 뺑덕이넨가 의심을 허고 나뭇잎만 퍼썩 떨어져도 뺑덕이넨가 의심헌다.
이러한 심봉사의 모습은 이후 벌어지는 목욕 도중 옷을 도둑당하는 사건에서도 희화화되지 않는다. 이 때의 심봉사는 지나가는 태수에게 담뱃대까지 달라 하는 뻔뻔스럽고 염치없는 모습을 보이기가 예사이지만 안향련은 이 사설을 간단한 아니리로 처리하면서 심봉사의 상실감을 가중시켜 준다. 이후 안씨맹인과의 결연, 황봉사가 한 눈만 뜨는 일 등 강산제가 독특하게 소유하고 있는 사설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적선지가 필유여경이 부처님 도술의 결과임을 알린다. 안향련은 보성소리 즉 강산제의 사설을 바탕으로 하여 김소희제 심청가를 비장감을 고조시키기 위해 엮어 넣었다. 이러한 결과 전체적으로는 심봉사의 세속화가 덜 진행되고 비장이 더욱 우세한 심청가의 미학을 창출하였다. 안향련은 주로 아니리 부분에서 강산제보다는 간략한 방향으로 사설을 수정하고 심봉사가 이중적 분열상을 보이거나 비속하게 여겨질 만한 부분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사설을 짜나갔다. 이는 김소희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한편으로 안향련은 반복되는 문장에서 새로운 작시단위를 간략하게 넣기도 하고 과감히 생략도 한 것으로 보인다. 범피중류 이후의 인당수 가는 길을 뺀 것이 이러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뺑덕어미 행실치레는 대동소이한 듯 하지만 그녀만의 독특한 사설짜기로 진행되어 어느 것과도 같지 않다.
쌀 퍼주고 떡 사먹고 베 주고 고기 사기 헌 의복 엿 사먹고 잡곡일랑 돈을 사 청주 탁주 모두 받어 저 혼자 실컷 먹고 시원한 정자 밑에 웃통 벗고 낮잠자기 사시장철 밥은 않고 이웃집에 가 밥붙이기 코 큰 총각 유인. 여자보면 내우하고 남자보면 씽긋 웃고 빈 담뱃대 손에다 들고 보는 대로 담배 청키. 이 돈 저 돈 모두 받어 조석으로 불받기와 상하촌 머슴들과 판잡고 춤추기 이웃집에 가 욕잘하고 초상집에 가 쌈잘하기 잠자며 이갈기와 배 긁고 발목 떨고 한밤중으로 울고. 일에는 반편이요 말에는 촐랑이라 목울속은 꽹매기라 힐끗하면 핼끗하고 핼끗하면 힐끗하고 삐죽하면 빼죽하고 빼죽하면 삐죽허고 남의 혼인 허려 하고 단단히 믿었는디 해담을 잘하기와 신부신랑 잠자는디 가만 가만 가만 가만 문 앞에 들어가서 손뼉치고 불이야
이렇게 사설의 적극적인 개작 의식을 엿볼 수 있음은 안향련의 사설 수용이 전승에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한 의식적인 노력의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한편 심봉사가 뺑덕이네와 황성가는 길의 길소리는 보통 메나리조로 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안향련은 이 부분을 ‘경상도 메나리조 반 전라도 김매는 소리 반으로 반반으로 길소리를 매기는 것었다’라고 하며 보다 애원성 있는 길소리를 함으로써 황성가는 길이 구슬픈 심사임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도 안향련만의 독특한 방식이라고 할 것이다.
2) 흥보가 안향련은 흥보가를 김소희로부터 전수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설을 통해 확인해 본 결과에 의하면 그렇지 않다. 안향련의 흥보가는 그 바탕이 박록주의 창본과 일치하고 있으며 일부분을 김소희의 사설에서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놀부가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 이후가 없으므로 전체적인 사설의 구조를 논하기는 힘드나 안향련의 흥보가는 동편소리 중에서 박록주본을 계승한 것으로 보아 무방하다. 초압부터 중이 집터 잡아주는 장면까지 그 사설이 박록주본과 대동소이한데 이후 흥보가 부러진 제비다리를 고쳐 주고 제비가 강남에 가서 그 사정을 말하는 장면까지는 김소희제의 흥보가를 때워 넣었다. 그러나 이후 제비노정기에서부터 놀부가 제비 후리는 대목까지는 다시 박록주본을 중심으로 짜여져 있다. (김진영, 김현주, 최혜진 외 공편, ꡔ흥부전 전집ꡕ 1, 박이정, 1997. 참조. )
김소희는 박록주에게 흥보가를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김소희의 흥보가는 박록주본과 많이 다르다. 김소희는 그녀의 사설을 새로 짠 것이 많고 여러 창본 사설을 교합하여 넣은 것도 있다. 박록주본이 전체적으로 해학적인 면을 추구하고 있다면 김소희본은 그 속에서도 흥부의 가난한 정황이 주는 애잔함이 많은 면 확대되어 있다. 가난타령이나 흥부와 그 처의 품팔이 장면 같은 것이 그것인데 이러한 사설은 박록주본에는 없는 것이다. 안향련은 박록주본의 해학성을 흥보가의 미적 바탕으로 삼고 있다. 보성소리에서는 흥보가의 전승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는 흥보가가 잔재미와 흥미 위주의 사설을 짜기 때문이라고 한다. 최동현, 앞의 책, 40면. 그러나 안향련은 심청가 다음으로 흥보가를 그녀의 장기로 삼으면서 미학적으로는 완전히 정반대된다고 할 수 있는 해학미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녀가 바탕으로 삼은 소리는 김소희제라기 보다는 박록주제의 것이었다. 흥보가를 동편소리로 하는 것은 그녀의 호탕한 성음에 잘 부합하는 것이라 보인다. 그녀의 통성이 그리고 성음이 그 진가를 발휘하는데 흥보가는 박록주본이 더욱 적절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여기서도 사설의 작은 차이는 발견된다. 특히 아니리 부분은 대체로 자신이 소화하여 메우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점은 그만큼 안향련의 소리가 어느 경지에 이르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4. 예술사적 의의 안향련은 해방기에 태어나 1970년대 인기를 누리다 간 아까운 천재 명창이다. 여러 이름난 스승 하에서 절차탁마의 수련을 계속한 그녀의 공력과 타고난 목구성은 그녀를 대성시킬 여지가 충분했으니 아쉬운 마음 금할 길이 없다. 그러나 그녀의 긴 평생을 우리가 보지 못했다고 해서 그녀의 예술성과 재능이 잊혀지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천재성이 빛을 잠시나마 섬광같이 발했기 때문에 우리는 두고 두고 그녀를 기억하며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안향련이 남긴 여러 음반들은 그녀의 천부적인 자질과 함께 예술적 성과를 다시 한 번 짚어보게 만든다. 안향련은 여러 스승에게서 배운 뛰어난 장점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고 창조적으로 계승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 명창으로서의 조건을 충분히 충족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녀의 소리를 들었을 때 청중이 압도당하게 되는 것은 타고난 성음에 시김새, 부침새 등의 정교한 기량이 터득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안향련의 소리가 그동안의 여성 명창들에게서는 들어보지 못한 격정적이고 쭉 뻗어 오르는 힘있는 통성이며 자유로이 구사하는 넓은 음역과 강한 힘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녀의 소리는 우리 시대 여성 명창들의 새로운 전범을 제시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에 와서 마이크나 녹음기술의 발달은 기운빼지 않고 사뿐히 목소리를 내어 기교에만 충실하려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이러한 추세가 계속된다면 판소리의 성음은 자꾸 기계에 의존하는 경향으로 흐르게 되고 단전으로부터 뿜어내는 통성의 연마는 게을러지게 될 것이 자명하다. 자신의 혼신을 소리로서 드러내고자 노력할 때 청중들은 안향련의 힘있는 소리를 또다시 듣게 될 것이다. 안향련의 소리는 마치 그의 삶과 같다. 절제된 비장이며 폭발 직전의 활화산이다. 그러한 그녀의 소리로 듣게 되는 심청가는 그래서 더욱 처절하고 비장하다. 현대 여성 명창들의 소리가 기교 위주로 흐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판소리에 대한 연창자 자신의 정열이 또는 삶이 안향련만큼 치열하지는 못할테니까 말이다. 안향련은 소리에 정열을 바치면서 돈에 굴하지 않고 사랑을 찾으려 했던 명창이며 소리의 전승에만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소리를 찾아 끊임없이 노력했던 명창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판소리사에서 1970년대에 명성을 드날렸던 안향련을 우리 시대 귀한 여성 명창으로 기억해야 할 것이다.
------------------------------------------------------------------------------------ 판소리 명창 안향련 글,자료 제공/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명창 안향련! 열두살 많은 띠동갑 정도의 선배들뿐 아니라 스승도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았던 판소리 천재이다. 마치 작두라도 탄 듯 신들린 듯한 소리를 들려주었던 안향련! 그녀를 아끼던 원로 선배와 수많은 골수 귀명창들이 많이 세상을 떠났고 그 때문인지 그녀의 진면목은 점차 베일에 가려진 채 잊혀져 가고 있는 느낌이다. 요절한 판소리 명창 안향련! 이번달 <<명인 명창 박물관>>에서는 이 안향련 명창의 면모를 찾아 여러 국악인들의 증언 및 문헌자료를 모아 보았다. 안향련 명창은 출생시기와 고향, 학습내력이 불분명한 상태인데 다음은 1979년 5월 14일 서울 한국일보사 강당(12층)에서 사단법인 판소리보존연구회 주최로 열린 제8회 판소리 유파 발표회-계면조,호걸조 공연 안내 인쇄물에 기록되어 있는 출연자 안향련의 약력이다.
안향연: 매품 팔러 갔다 오는 데까지(공연 내용) 전남 목포 출신, 1939년생, 전응민(정응민의 오자) 박녹주 정권진 선생께 사사. 안향련 명창이 타계하기 직전에 남긴 심청가 음반(오아시스레코드사 OL-2251, 1LP, 1980년)의 뒷표지에 기록되어 있는 안향련의 약력 일부분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1945년 전남 광산군에서 출생. 11세 때부터 정응민, 김소희 선생께 사사. 그리고 1978년 8월 11일자 {한국일보}에 실린 <<문화예술에 인색한 한국방송>>이라는 기사를 보면 1970년대 후반 당시 텔레비젼 국악 프로그램에 가장 많이 출연한 국악인 1,2위가 바로 조상현, 안향련 명창이었음을 통계자료로서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조상현과 안향련은 단짝으로 함께 많이 활동했다. 이도령과 춘향이, 심봉사와 심청이 등등 명콤비였다. 다음은 1981년 12월 22일자 {한국일보}에 실린 안향련 명창 타계를 보도한 신문 기사이다.
제목: 30대 여국악인 자살 20일 하오 9시 40분께 서울 성북구 정릉2동 223의9 삼락아파트 B동 102호 안향련씨(36, 여, 국악인) 집 안방에서 안씨가 극약을 마시고 숨져 있는 것을 친지 김영철씨(39, 화가)가 발견, 경찰에 신고했다. 김씨에 의하면 이날 자신이 갖고 있던 안씨집 현관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안씨가 두손만 내놓은채 이불을 뒤집어 쓰고 숨져 있었고 머리맡에는 빈약병 1개와 유서 6장이 남아있었다는 것. 19년전 목포에 있는 임모씨와 내연의 관계에 있다 헤어진 뒤 국악인으로 생활해온 안씨는 2년전부터 김씨와 가까이 지내왔는데 최근 가정을 가진 김씨와의 사이가 멀어진 것과 지병인 위궤양을 비관해 왔다. 판소리 춘향전의 젊은 국악인인 안씨는 인간문화재 김소희씨 밑에서 수여받았으며 국악계의 유망주였었다.
다음은 2002년 1월부터 5월까지 필자가 국악방송의 <<명인 명창 명음반>> 프로그램에서 연재한 안향련 특집을 통해 방송된 내용 가운데 일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지면 관계상 그 취재 내용을 여기 모두 싣지 못하고 가능한 만큼 최대한 정리하여 기록으로 남기는 바이다.
[성우향 증언] 내가 지금까지 접해 본 역대 판소리 중에서 가장 듣기 좋았고 가장 기억에 남는 소리를 한 남자 명창은 강장원, 여자로는 안향련의 성음이 제일 좋았다. 안향련은 철성에 가까운 성음인데 목이 나고 튼튼하고 시원한 느낌을 주는 목구성을 지녔다. 다만 안향련은 그 좋은 성량과 빼어난 음색에 비해 아쉬운 건 소리할 때 감정이 부족한 게 좀 흠이었다. 암튼 안향련은 청이 되고, 빨래 짜듯이 소리를 졸라 뗐다 풀었다가 소리를 박진감있고 무섭게 잘했다. 옛 표현대로 하자면 서슬이 있는 소리를 했다. 안향련은 평소 술을 많이 먹었는데 보통 사람들은 술을 먹으면 소리가 잘 안되지만 안향련은 밤새 술을 마셔도 막힘이 없었고 특이하게도 먹을수록 소리를 더 잘했다. 안향련은 장영찬에게 판소리를 배운 바 있다. 나 성우향은 1974년경에 안향련의 주선으로 안향련을 비롯한 여러 사람과 함께 창극 춘향전, 심청전, 흥보전 음반을 취입했다.(현대음반회사 LP음반) 이때 나는 창극 적벽가, 수궁가, 장화홍련전 음반 녹음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당시 춘향전과 흥보전 음반은 나 성우향의 경우 내가 담당한 부분은 하루에 모두 다 녹음을 마쳤다. 그리고 심청전은 난 두 번에 걸쳐서 녹음을 하러 갔는데 첫 번에는 초입부터 <시비 따라가는 데>까지 성창순과 함께 취입을 했고 두 번째 가서는 그 이후 대목들을 안향련과 함께 녹음을 했다. 이때 심청전 전반부를 녹음할 때 고수가 성창순의 친척 한일섭이었는데 한일섭이 나보다 성창순이 소리할 때 추임새를 더 많이 잘 해주었다. 당시 그 음반들을 취입할 때 여러명이 빙 둘러 앉아 소리를 했다. 나는 심청전 취입 당시가 영화사에서 백일 공부를 마치고 나온 때라 목이 쩌렁쩌렁하게 잘 나왔다.(2001.12.6.16:30∼17:30.서울시 관악구 신림동 성우향 판소리 전수소에서 증언)
[오정해 증언] 안향련 명창에 대한 얘기는 김소희 선생님한테 많이 들었다. 김소희 선생님께서 늘 안타까워 하셨고 중요한 제자라는 얘기를 많이 하셨다. 우연치 않게도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안향련 명창의 장지를 따라갔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그분이 어떤 분인지도 몰랐고 누구의 장지를 따라가는지도 모르고 무턱대고 당시 소리 학원 선생님하고 같이 갔던 기억이 나는데 그곳이 나중에 알고 보니 바로 안향련 명창의 장지였다. 그것이 어떻게 우연한 계기가 됐는지 나중에 나는 김소희 선생님 문하에서 선생님 제자로 소리를 공부했었다. 당시 안향련 명창의 장지 분위기는 주위분들이 참 안타까워 했다는 거, 참 아까운 사람이 죽었다고 연신 이야기를 하였다. 그래서 어떤 분이셨길래 그러나 궁금했는데 그때 주위의 얘기가 너무너무 예쁘셨고 아주 소리가 고왔고 재주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때 누군지는 몰랐지만 나도 그분처럼 그런 얘기를 듣는 명창이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장지는 목포에서 가까운 명산이라는 곳이었던 기억이 나는데 지금도 그곳에 묘지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고 그 당시 김소희 선생님은 안향련 명창의 장지에 없었고 아마 안향련 명창의 아드님 되시는 분이 영정을 들고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김소희 선생님이 평소 제자 안향련이 자신의 소리와 많이 닮았다고 말하곤 했다. 그후 나중에 안향련 명창의 판소리 녹음을 들었는데 김소희 선생님의 창법, 소리제를 아주 고스란히 닮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고 굉장히 소리에 힘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어느 구석, 어느 부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다부진 욕심이 느껴졌다.(2002.1.2.12:00∼13:20.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한국방송 본관 5층 라디오방송 8스튜디오에서 오정해 증언)
[백인영 증언] 안향련의 원고향은 나주이고 여덟살 때인가 목포로 갔다. 안향련은 나와 1945년생 동갑인데 그녀와 처음 대면한 것은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이다. 안향련은 원래 호남지방서 아주 활동을 많이 한 자신의 아버지 안기선씨에게 어려서 판소리를 배웠다. 그리고 나중에 박봉술(적벽가), 정응민씨한테 소리를 사사했다. 안향련은 음악 재질을 타고난 사람이다. 못하는 게 없었다. 판소리는 당연하고 가야금, 아쟁, 철현금, 그리고 심지어는 승무북까지, 춤도 웬만한 무용가들보다 더 잘했다. 그래서 예술성으로 똘똘 뭉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안향련의 특이한 점은 음정이 엄청나게 높았다는 것이다. 목이 카나리아같이 예쁘고 상청이 아주 잘 나왔다. 또 공력이야 말할 수 없이 대단했다. 공연 같은 걸 하게 되더라도 선배들을 능가할 정도로 대단한 실력가였다. 그리고 술을 좋아했고 우리 남자들보다 더 술이 셌다. 밤새 먹어도 그분은 술이 안취했다. 재담도 아주 재미있게 잘하고 딱 글자 그대로 쟁이었다. 참 판소리꾼이었다. 민요도 목이 좋다 보니까 그분이 하면 아주 특이하게 들렸다. 같은 목을 써도 그분 소리는 좀 더 맛이 있고 아름다운 뉘앙스를 항상 심어준다. 너무너무 아까운 분이라고 한마디로 평을 하고 싶다. 한번은 같이 무대에 섰는데 선배들하고 같이 합창을 하면서 독창을 할 때면 그야말로 우뢰와 같은 박수를 받고 좋은 호평을 받고 그랬다.(2002.1.7.서울시 서초구 서초동 국악방송 스튜디오에서 백인영 증언)
[김수연 증언] 내가 아는 안향련씨! 항상 나는 그 언니를 굉장히 좋아했다.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때 나는 그 언니 살아 생전에도 언니라는 칭호보다는 안향련씨라고 하는 게 좋았다. 물론 그분을 직접 부를 때는 언니라고 그랬지만 말이다. (웬지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분을 함부로 지칭하고 싶지 않았고 그렇게 조금이라도 존칭으로 말하고 싶었다.) 그 안향련씨의 판소리가 너무너무 좋았고 그런 천구성을 타고난 그 선배! 그 언니의 시대가 그런 분이 많지가 않았다. 정말 판소리로서는 타고난 사람이고, 그러니까 1975년도에 남원 명창대회가 있었는데 그때 제1회에 조상현, 성창순, 안향련 (명창이 참가했다.) 안향련 언니는 그 대열에 항상 끼었다. 근데 제1회는 조상현씨가 장원을 하시고 그때는 감히 내가 못나갔는데 2회 때 나갔다. 그때 벌써 그 향련 언니는 명창 대열에 끼어 있었고, 나는 안향련씨하고 네 살 차이밖에 안나지만 그때 내가 본 안향련씨는 굉장히 명창이었고 우린 학생 신분이었고, 그래서 역시 제3회에 향련 언니가 장원을 했다. 그때만 해도 참 우리가 우상으로 바라보고, 그리고 그 다음해 4회에 신영희씨, 5회에 내가 장원을 해서 항상 남원에 가면 그 심사위원들 석에 그 안향련 언니랑 같이 앉았던 기억이 지금 너무 새롭다. 우리 판소리계에서는 지금도 그런 인물이 아직 없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다, 우리 시대나 그 언니 시대에 봐서. 예쁘고 키도 적당히 크고 소리 좋고 하여튼 예술성이 너무 뛰어났는데 그렇기 때문에 욕심이 너무 많았다. 그 언니는 소유욕이 너무 많아 가지고 뭐를 하나 집착을 하면은 거기에 너무 빠진다. 그래서 예술을 또 잘하지 않았나 싶다. 평소에 너무너무 존경을 했고 그래서 지금도 너무도 보고 싶은 안향련씨이다.(2002.2.21.서울시 서초구 서초동 국악방송 스튜디오에서 김수연 증언) - 끝 -------------------------------------------------------------------------------------
요절과 비련의 명창 안향련(安香蓮) 명창 안향련 신나라서 CD 8장짜리 전집 나와 (서울=연합뉴스) 이종호 기자 = 현해탄 거친 물결에 스스로 몸을 던진 윤심덕이 절망적으로 증거해주듯, 금지된 사랑의 끝은 언제나 비극이었다. 겨우 서른일곱 남짓, 한겨울 깊은 밤 약봉지를 입에 털어넣어 세상을 버린 소리꾼 안향련(安香蓮. 1944-81)의 생애는 한 마디로 '사랑에 살고 노래에 살고'였다. 사랑과 예술밖에는 아무것도 몰랐다. 생을 마감한 방식은 윤심덕만큼 극적이지 않았지만 약물 과다복용에선 빌리 홀리데이를 연상시킨다. 안향련은 자기 세대 최고의 명창이었다. 한 눈에 재능을 알아본 김소희가 데려다 수제자로 삼을 만큼 그의 소리는 청아하면서도(천구성) 흐리고(탁성) 곰삭은 맛(수리성)까지 갖췄으며 표현력이 남달랐다. 이번에 신나라레코드에서 CD 8장에 담아 정리한 그의 전집이 이를 충분히 증명할 것이다. 게다가 미모였다. 그리고 육감적이었다. 보성에서 소리 공부하던 시절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얼굴 좀 보자고 몰려들었다고 전해진다. 그와 동거했던 한 남성은 그를 가리켜 "살이 우는 여자"라면서 그와 사랑했던 남자라면 누구든 결코 그 살맛을 잊지 못할 거라고 했다. 품성도 다감했다. 그에게서 판소리를 배운 바 있는 유미리에 따르면, 안향련은 인정이 깊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비를 맞고 가면 몸을 씻겨줄 만큼 자상했다. 국창 임방울의 고향이기도 한 전라남도 광산군 송정리에서 태어난 안향련은 11세 때부터 부친 안기선에게, 10대 후반부터는 정응민, 정권진 등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1968년 전국국악경연대회에서 김소희와 인연을 맺으면서 활동 근거지이던 부산을 떠나 상경했다. 1970년부터 KBS MBC TBC 등의 국악 프로그램에서 판소리와 창극의 주인공 노릇을 도맡아하다가 1981년 12월 세상을 등졌다. 짧은 생에서 그는 많은 것을 남겼다. 특히 판소리의 서름조를 차원 높은 미학으로 발전시킨 공은 특기할 만하다. 깊은 설움에서 우러난 판소리의 비장미는 종래의 표현법으로는 성취할 수 없던 그 무엇이었다. 안향련은 처자식이 있는 남자를 사랑했다. 이당 김은호의 수제자로 꼽히던 화가였다. 이루지 못할 사랑은 상처와 고통을 남기는 법. 그것을 죽음으로 매듭짓는 것은 삶의 신산(辛酸)을 넘어 아름다운 뒷날을 기약하는 그 나름의 방식이었으리라. 그의 자살에 대해서는 '착실히 준비된 죽음'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심청가' 완창에 이어 '흥보가'도 완창을 해두었다. 물론 무대에서가 아니라 방송사에 가서 매일 생중계하는 방식이었지만. 그리고는 그 끝물에 이르러 약을 먹었던 것이다. 안향련의 생애에 대해 '혼불'의 작가 최명희(崔明姬. 1947-98)는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의 소설 '제망매가'(祭亡妹歌)의 모델이 바로 안향련이다. 부친에게서 소리의 기초를 닦은 후 안향련은 보성의 정응민과 정권진에게 배움으로써 자신의 판소리 바탕을 찾기 시작한다. 정응민은 숱한 명창을 배출한 큰 소리꾼이었다 안향련 소리에 결정적으로 생기를 불어넣어준 인물은 장영찬(張泳瓚. 1930-81)이다. 안향련은 장영찬에게서 1963-65년 무렵 배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장영찬의 소리는 성색이 분명하고 목구성이 다양해지면서 원숙한 경지에 도달해 있었고, 안향련은 그런 그에게 배우면서 자신만의 예술창조를 위한 튼실한 바탕을 마련했던 것이다. 안향련은 마지막으로 김소희의 제자가 된다. 때마침 서울로 진출한 남자 명창 조상현과 단짝이 되어 서울 무대를 누비고 다녔다. TV와 라디오에서 주역을 도맡아 대중의 인기를 한껏 누렸다. 춘향 심청 황진이 등 주요 인물을 철저하게 소화해냈다. '뿌리깊은 나무 판소리 감상회' 등에서 완창 판소리 무대를 갖기도 했다. 김소희는 안향련에 대해 "아무 사설에나 곡만 붙이면 소리가 되는 사람"이라며 그의 천부적 재질을 칭찬했다. 그러나 안향련과 함께 또다른 애제자 김동애까지 병사하게 되자 스승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김소희는 두 제자를 위해 김대례(진도씻김굿 인간문화재) 굿패를 불러 굿을 했다. 좋은 곳으로 가서 소리의 신으로 다시 나기를 비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러나 굿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김소희를 비롯한 명창들이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김대례의 굿 노래를 따라하며 제의에 동참했기 때문이다. 음악학적으로 말하자면, 판소리와 씻김굿의 음악이 상호 관계를 맺고 있음을 확인시키는 계기이기도 했다. 요절한 예술가의 생애는 언제나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작품은 대개 높은 평가를 받기 마련이지만 삶 자체는 미완성이므로 '종합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한다. 그러나 안향련의 경우,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자기 세대에서 그만한 기량을 과시한 사람은 없었다는 점이다. 경기대 국문학과 김헌선(金憲宣) 교수는 안향련에 대해 "당시 여류 명창이 많았으나 그중에서도 특히 목구성(목청)이 좋고 세련됐으며 소리의 공력이 확연히 뛰어나 판소리의 전반적 수준을 한 단계 올려놓은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김 교수는 또 "안향련은 70년대 TV의 본격적 보급과 함께 시각적 매력을 유감없이 발산한 초기 시청각 시대의 수혜자"라고 전했다. 신나라 CD에는 '심청가' '흥부가' 등 판소리를 비롯해 오정숙 남해성과 함께 부른 토막소리들도 실려 있다.
Long Goodbye - Camel <노르웨이 숲>에서 나가사와는 와타나베에게 이야기했다. "그레이트 개츠비를 세 번 읽은 자라면 친구가 될 수 있지." 나는 이야기하고 싶다. "롱 굿바이를 세 번 연속 트는 자라면 원수가 될 수 있지."
Old & Wise - Alan Parson's Project 고등학교 때 굉장히 좋아했었다. 헤르만 헤세 같은 곡이다. 그때나 좋아할 곡.
Try me - UFO 마이클 쉥커는 스콜피온즈에서 나왔다는 것으로 괜히 평가 받는 기티리스트가 아닐까. 스콜피온즈나 UFO나.
Endless rain - X-japan rain이 들어가고 제대로 된 곡이 뭐가 있을까. 난감하다. 대체 이런 노래를 표절하는 가수나, 그게 또 히트하는 여기나.
Midnight Blue - E.L.O 라이트 오케스트라란 결국 카바레 사운드가 아닐려나.
Stand by me - Oasis 오아시스를 대놓고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 안 친해진다. 아니 안 친해지고 싶은 걸지도. 그 중에서도 이 노래는 이지메하고 싶어진다. (열군 미안ㅎ)
Summertime - Janis joplin 재니스 조플린의 목소리를 원래 안 좋아하지만, 90년대 초중반 서머타임 신청하고 괜히 폼잡던 언니오빠들이 그리 얄미웠다. 지금도 계신가요?
Somewhere over the Rainbow - Impellitteri 영화 스코어를 기타로 장난치는 짓거리의 효시가 임펠리테리의 이 곡이 아닐까. 그 죄로 무지개 너머 그곳에 100년간 이 곡을 감금!
Parisienne Walkways - Gary Moore The Messiah Will Come Again - Roy buchanan 영동 부루스, 무정 부루스, 대전 부루스 등등의 이른바 '부루스' 곡이나 이 곡이나 그 안의 정서는 별차이 없지 않을까.
근데 사실 이런 노래들 어쩌다 한 번쯤은 듣고 싶어질 때가 있다. 내 안의 숨은 매저 성향일까.
11시 51분 이 회사 들어와서 좋은 점 중 하나는 KBS 1FM을 종일 틀어놓고 있다는 것. 지금 기가 막힌 판소리가 나와 KBS 1FM에 들어가 뭔지 확인해봤더니 안향연이 부른 판소리 <흥보가 중 놀부심술대목부터 흥보 쫓겨나는데까지>란다. 안향연이라고 검색해보면 '요절한 천재 명창'이라고는 하는데 별다른 자료가 없다 (다행히 흥보가는 시디로 나와 있다). 아, 정말 기가 막히구나. 이렇게 좋은 곡도 모르는 주제에 후지고 구린 곡이 어떻다니 하는 게 우스워졌다.
프라임 맥주시장에 고전중인 하이트맥주가 ‘하이트 프라임’을 접고 신제품 ‘프라임 맥스’를 출시할 예정이다. 20일 주류업계에 따르면 하이트맥주는 오는 28일 ‘프라임 맥스’를 신규 출시하는 등 브랜드 구조조정을 실시할 것으로 알려졌다. 새로 선보일 ‘프라임 맥스’는 알코올 함량 4.5% 출고가는 330㎖ 병 800원선, 355㎖ 캔은 1700원 선이다. 이는 경쟁 브랜드인 오비맥주의 카프리(병 794원·캔 1049원)보다 약간 높은 수준이다. 하이트맥주는 프라임 맥스를 출시하면서 병·페트병·캔 등을 동시에 유통시킨다는 방침이다. 하이트맥주측은 “‘하이트 프라임’은 ‘프라임 맥스’와 1개월 정도 함께 유통시킨 뒤 정식 단종 조치를 취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오는 9월 말쯤이면 시중에서 프라임 맥주가 사라진다는 뜻이다. ‘프라임 맥주’는 지난 2002년 출시된 뒤 한차례 상표 변경과 함께 알코올 함량을 낮추고 가격을 내리는 등 리뉴얼을 단행한 바 있다. 하이트맥주는 ‘하이트’와 신제품인 ‘프라임 맥스’를 쌍두마차로 맥주시장의 선두자리를 지켜나간다는 각오다. 하이트맥주가 ‘프라임’ 생산을 중단하고 신제품을 출시하는 것은 프리미엄 맥주 수요가 한정된데다 외국산 프리미엄 맥주의 수입 확대, 맥주시장 정체 등 숱한 악재가 산적했기 때문이다. 업계 전문가들은 “맥주시장의 오랜 불황이 하이트측의 브랜드 구조조정을 단행한 배경”이라고 분석했다.
/shower@fnnews.com 이성재기자
이제 하이트 프라임이 사라지면 무얼 마시란 말인가!
대충 생각해도 근 2년 간 평균적으로 하루에 두 병씩은 꼬박꼬박 하이트 프라임을 마셔왔거늘...